이브피아제(@serenewing)
관훈대학교에는 근로학생을 위한 자리가 정말 많다. 보통 근로학생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학과 행정실 보조부터 학생식당 조리실 보조까지, 학과와 연계된 활동을 하면서 소소하게 용돈벌이를 할 수 있다. 그 수많은 교내근로 중에서도 ‘아무나 못 한다’는 자리로 알음알음 소문난 자리가 있는데, 바로 미술대학교 도서관 카페 근로였다. 그 카페는 1학기의 정기 전시, 2학기의 졸업 전시 시즌이 오면 학교에서 먹고자고를 반복하며 한껏 신경이 날카로워진 학생들과 그 학생들을 감당하느라 같이 말라가는 교직원들의 카페인 공급원이었다. 학생 복지의 일환이다 보니 전시기간과 시험기간에는 카페 마감도 늦어지고 예민한 손님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웬만큼 체력이 되고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지 않은 이상은 어지간해선 뽑지도 않았다. 교내근로는 교내활동 장학금 형식이라 중간에 포기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악명높은 미대도서관 카페에 2학기 째 연속으로 일하는 학생이 생겼다. 보통 한 학기만 하고 포기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관훈대 에타에서도 은근히 화제가 되었다.
“지훈아, 너 오늘도 근로 가냐?”
“어.”
“거기 개힘들다던데 할만해?”
“힘들대?”
“에타에 니 얘기 또 나왔잖아. 미대 카페 두번 하는 사람 니가 처음이래.”
“진짜? 난 그냥 할만한데…”
에타에 본인 얘기가 나왔다는 말에도 크게 놀라지 않는 이 학생은 연극학과 2학년 휴학생 박지훈으로, 실기 면접을 보러 왔을 때부터 꾸준히 에타에 등장했다. 100m에서 보면 예쁜 얼굴이 50m, 20m, 점점 가까워질수록 잘생겨지고 바로 앞에서 보면 얼굴이 또 다르다며 ‘연극학과 미터기’로 유명했다(사실은 500m앞에서 봐도 바로 지목할 수 있는 독특하고 화려한 패션 센스로도 유명했다). 신이 공들여 만들었을 것 같은 섬세한 얼굴과는 달리 덤덤하고 무던한 성격으로, 주변에 사람이 많은 듯 많지 않았다. 지훈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용기있게 고백한 사람들이 꾸준히 거절당하는 걸 보면서 다들 속앓이만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훈이 왔니? 오늘도 화이팅하자!”
“네!”
미대 카페 담당자에게 지훈은 그저 예쁜 근로학생이었다. 지금까지는 매 학기마다 새 근로 학생을 받아서 처음부터 가르쳐야 했는데 두 학기 째 근무하는 것만 생각해도 예쁜데, 지훈이 일하고 난 뒤에는 손님들의 짜증도 확 줄었다. 역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미적 기준이 충족되는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닐까, 하고 시답잖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야작 기간에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아메리카노… 큰사이즈… 샷추가요….”를 중얼거리던 학생도 지훈이 생긋 웃으며 “아메리카노 라지사이즈 샷추가요,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면 비타오백을 마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어, 저기 그 대만 학생 온다.”
“...”
“지훈이도 잘생겼는데, 저 학생도 진짜 잘생겼다니까.”
“아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저 학생은 카페에 한번을 안 오더라? 커피를 싫어하나?”
“그, 그러게요.”
지훈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미대에서는 ‘조소학과 대만조각’하면 다 안다는 그 학생은 대만에서 관훈대학교에 온 교환학생이었다. 누군가가 석고상과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을 찍었는데 석고상보다 뚜렷한 이목구비로 조소학과 단톡을 뒤집었다. 하얗고 차가워 보이는 미남이지만 가끔 누군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통화할 때만 어린애처럼 웃는다고 했다. 패션디자인학과 졸업 쇼에 모델로 세우고 싶은 졸업반 학생들이 많아서 물밑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대만조각 라이관린은 가끔 텀블러를 들고 다니긴 하지만 미대 카페에서 커피를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소학과 대만조각과 연극학과 미터기의 투샷을 내심 기대했던 카페 담당자는 그게 은근히 아쉬웠다.
중간고사 기간이 되기 전이라서 미대 도서관을 왔다갔다하는 학생들의 얼굴도 아직은 화사했고, 손님이 많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한두 시간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되겠다는 생각에 카페 담당자는 지훈을 혼자 카페에 남겨두고 떠났다. 창고에 들러 재고를 파악하고, 개인적인 볼일을 좀 보고 돌아갔더니 지훈이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지훈아,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네? 아니요?”
“얼굴이 새빨간데? 열나는 거 아니지?”
“괜찮아요.”
혹시 몸이 안 좋은 걸까 싶어 일찍 들여보냈더니, 다음 근로일엔 멀쩡해진 얼굴로 출근하는 지훈을 보고 담당자는 안심하고 그 일을 그대로 잊어버렸다.
한 달 쯤 지나, 중간고사 기간이 왔다. 미대 카페도 원두 입고를 늘리고 마감시간을 늦췄다. 학생들의 얼굴이 매일매일 새롭게 초췌해졌지만 대만조각남은 다크서클이 조금 진해졌을 뿐 여전히 하얗고 매끈했다.
“힘들지? 그나마 니가 휴학생이라 다행이다.”
“괜찮아요. 그래도 이제 2주도 안 남았잖아요.”
“그건 그렇지. 피곤하면 아아메 내려서 마시면서 해.”
“네.”
마감이 30분 쯤 남아서 슬슬 학생들도 집에 가든가 밤을 새우러 가서 카페도 한산해졌다. 카페 담당자와 지훈은 이제 청소라도 할까요 그럴까 하며 멍하니 있었는데, 저 쪽에서 대만조각남이 카페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에는 카페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담당자는 대만조각과 미터기의 투샷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지훈아, 지훈아! 주문 받아야지!”
“저, 저 영어 못 하는데… 사장님이 받으시면 안 돼요?”
“저 학생 한국말도 제법 한대. 걱정말고 주문받아!”
지훈이 쭈뼛거리며 계산대에 섰다.
“어서오세요.”
평소에는 마감이 가까운 시간에 오는 손님에게도 눈을 맞추며 예쁘게 웃던 지훈이 목소리도 작고 시선을 피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대만조각남은 거침없이 커피를 주문했다.
“사랑해 마끼아또 한 잔이요.”
어?
카페 담당자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카라멜 마끼아또를 사랑해 마끼아또라고 잘못 들었다고 얘기하면 진짜 웃기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또 한 번 같은 말이 들려왔다.
“사랑해 마끼아또 한 잔이요.”
“...카라멜 마끼아또 한 잔이요. 감사합니다.”
벙쪄서 주문대를 보니 대만조각남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지훈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고, 지훈이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대만조각남을 외면하고 있었다. 갑자기 얼마 전 자리를 비웠을 때가 떠올랐다. 지훈의 얼굴이 딱 그때같았다. 주문대를 사이에 두고 둘 사이의 공기만 온도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관객이 된 것 같아서 카페 담당자는 저도 모르게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지훈은 능숙하게 카라멜 마끼아또를 만들더니 우유거품을 따르고 나서 뭔가 한동안 꼬물거렸다. 그러더니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뚜껑을 반쯤 닫아서 커피를 건넸다.
“카라멜 마끼아또 한 잔 나왔습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보통은 뚜껑을 닫아서 내는데 굳이 반만 닫은 거 하며, 정해진 온도에 맞춰서 나가야 하는 음료인데 뜨거워서 안 닫았다는 식으로 변명하듯 덧붙이는 말이 너무나 수상했다. 분명히 저 커피에 무언가 있다!!라는 확신에 가까운 촉이 있었지만 손님을 붙잡고 커피 좀 봅시다, 할 수는 없었다. 커피를 받자마자 뚜껑을 열어본 대만조각남은 씨익 웃더니 지훈을 다시 쳐다보며 커피를 천천히 길게 한 모금 마셨다. 지훈은 고개를 반쯤 숙이고 눈을 돌린 채였지만
시선이 느껴지는지 귀까지 빨개지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대만조각남이 카페를 떠나고 나서야 담당자는 지훈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야, 지훈아! 뭐야 방금 뭐야?!”
“예? 어, 뭐, 뭐가요?”
“너네 아는 사이지! 아니, 친한 사이지?!”
“예? 누, 누구요?”
난감해하며 횡설수설하는 지훈을 보니 점점 더 수상했다. 둘이 아는 척은 커녕 카페에도 한 번 오지 않았었는데, 아까의 분위기는 절대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모르는 사이는 커녕, 그냥 친구라기엔 뭔가 다른 그런 게 있었다. 분명 뭔가 있다는 생각에 좀 더 추궁해보려고 했지만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지훈을 보니 못할 짓을 하는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빨개진 얼굴에 커다란 눈이 더 커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왠지 작은 동물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음, 이제 더 손님도 없을 것 같으니까 마감할까?”
“네? 네, 네!”
지훈이 좌석 쪽을 청소하는 틈에 카라멜 마끼아또 - 아니, 사랑해 마끼아또? - 를 만들고 난 자리를 정리했는데, 보통 카라멜 마끼아또에 쓰지 않는 초코펜이 나와 있었다. 초코시럽 펜으로 우유거품 위에 뭔가 써서 줬을 거라고 생각하자 탐정이 된 기분이었다. 대강 정리를 하고 있으니 청소를 마친 지훈이 주저하며 말을 걸었다.
“저, 사장님.”
“응?!”
“저, 아까 그거요.”
“어?”
“그, 관...린이랑…”
“어, 어어!”
대만조각남의 이름이 라이관린이라는 게 그제서야 떠올랐다.
“비밀...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응?”
“둘이 어, 아는, 아니,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그냥 아는 사이로 보일 상황이 아니었다 싶은지 지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애처롭기까지 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정이 있겠지 싶기도 하고 사정이 없으면 어떠하랴 싶기도 했다.
“알겠어, 알겠어. 비밀로 해 줄게.”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뭐 어디가서 뭐라고 얘기를 하겠어. 관훈대 미남 둘이 사실은 엄청 친하다더라? 그게 뭐야.”
말하다 보니 정말로 그게 뭐냐 싶어져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몇 번이나 다짐해주니 안심한 듯 지훈은 그제서야 살짝 웃어보였다.
카페를 마감하고 퇴근하는데, 도서관 앞에 길쭉한 그림자가 보였다. 대만조...아니, 라이관린이었다. 또 당황한 지훈은 이쪽을 봤다 저쪽을 봤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데, 라이관린은 태연하게 다가오더니 꾸벅 인사까지 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지훈이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야, 뭐래…”
그러더니 지훈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안고 데려가 버렸다. 카페 담당자는 도서관 앞에 혼자 남겨진 채 뭔가 낯설면서도 낯익은 기분에 휩싸였다. 뭐지, 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엑스트라가 된 기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