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어 여기서 담배 피면 안되는데."
담뱃불을 막 붙이려던 지훈에게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남자는 막 농구를 하고 왔는지 농구공을 허리에 끼고 있었고 앞머리가 약간 땀에 젖어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지훈은 '잘생겼네, 되게 하얗다.'라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을 보였다.
"난 괜찮아, 여기서 담배펴도."
"여기 주인 아주머니께서 여기서 담배피지말라고 그러셨어요. 창문으로 냄새 들어온다고."
"주인 아주머니가 많이 무서우셔?"
"아뇨. 그건 아닌데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하잖아요."
"그래? 난 우리 엄마 무섭던데."
지훈의 마지막 말을 듣던 남자는 곧장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을 달싹이는 남자를 앞에 두고 지훈은 정말로 담뱃불을 붙이려던 때였다. 마당에서의 소리를 들었는지 주인 아주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지훈과 남자를 보았다. 담배를 피고 있는 지훈을 본 주인 아주머니는 그대로 지훈을 향해 강한 스매싱을 날렸다.
"너 이놈자식 또 여기서 담배피지! 엄마가 대문 밖에 나가서 피라 그랬어 안그랬어 어?! 그제 전역이라 그래서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나뿐인 아들놈은 피씨방 간다고 이틀이나 집에 안들어 왔으면서, 왔으면 퍼뜩 들어올 것이지 집 바로 앞에서 담배나 피고 있고!"
"아 엄마 아파 아파! 여기 옆에 애 겁에 질린거 안보여? 아 좀 살살 때려..."
주인 아주머니는 그제야 남자가 눈에 들어왔는지 지훈의 등을 때리는 것을 그만두고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어머 관린아 딱 마침 잘 들어왔어~ 아줌마가 갈비찜 해놨으니까 어서 들어와~ 박지훈 너도 애들 소개시켜주게 들어와 어서."
친아들한테 이렇게 문전박대하기야? 이씨 이제 한모금 한건데 아깝게스리...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서는 지훈을 보며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그 방의 주인이 돌아왔구나라고.
*
중앙동에 위치한 관훈하숙은 6명의 하숙인을 둔 하숙집이었다. 마당에는 벚꽃나무가 있고 옥상에는 작은 화분들이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하숙집이었다. 애초부터 하숙집으로 쓰려고 만든 집인지라 내부에만 계단이 있는 2층 집이었는데 여하숙생들은 2층을 사용했고 남하숙생들은 1층을 사용했다. 그리고 관린은 1층 계단 옆에 위치한 방, 그 방의 주인을 늘 궁금해 했다. 밖에서 보면 하늘색 커텐이 쳐진 그 방과 거실 한 구석에 있는 가족 사진 속 환히 웃는 그 방의 주인을 궁금해 했다.
1학기 종강을 하고 여름 방학이 되어서야 관린은 그 방의 주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볼캡 속 살짝 짧은 앞머리와 커피우유색 피부를 가진 남자. 관린은 제 앞에 있는 사람이 그 방의 주인임을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관린은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곧 통성명을 할 수 있음에도 그냥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에게 반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학기에 복학 할 박지훈. 눈이 예쁘고 낯을 가리는 박지훈. 그 날 저녁 식사를 하며 관린이 본 지훈은 그러했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방으로 들어가버린 지훈이 못내 아쉬웠으나 관린은 조급해 않기로 했다. 시간은 충분했으며 그와 친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린은 첫 만남 이후 지훈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형, 피자가 좋아 치킨이 좋아? 형, 강아지가 좋아 고양이가 좋아? 형 우리 잘 맞는 것 같애. 신기하다-와 같은 다소 엉뚱하지만 귀여운 질문들로 지훈에게 말을 걸었고 지훈은 그런 관린을 귀여워했다.
그들이 차츰 친해지는 동안 여름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곧 개강을 앞둔 어느 날, 꼭두새벽 부터 관린은 지훈의 방을 두드렸다.
"형! 우리도 얼른 나가요! 지금 태성형이랑 민우는 벌써 줄 서러 나갔어요!!"
눈도 덜 뜬 채 관린의 손에 붙잡혀 나온 바깥은 아침임에도 조금 후덥지근 하였고 관린과 맞닿은 손은 한낮보다 더 뜨거운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산원 앞이었고 그제야 지훈은 관린이 아침부터 소란을 떤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수강할 과목을 OMR용지에 제출하던 시대가 끝이나고 새천년을 맞이하는 1999년도 답게 전산으로 수강 신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막 군대에서 제대해 이에 대해 잘 알리 없는 지훈을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관린은 미리 챙긴 얼린 물을 지훈에게 주며 아침인데도 아직 많이 덥다 그치? 이거 형 마셔.라고 말했다. 자신이 햇빛을 가려줄 테니 잠시 앉아 있으라던 관린에 지훈은 팔을 뻗어 부채질을 해주었고 그렇게 둘은 전산원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
개강 첫날, 관린은 지훈의 자리까지 맡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지훈이 오기를 기다렸다. 김씨가 불리기 시작하자 문을 열고 들어온 지훈은 급하게 자리를 찾았고 이내 관린이 작은 목소리로 지훈을 부르자 지훈은 관린의 옆에 앉았다. 라이관린, 네. 박지훈, 네. 연이어 둘의 이름을 부르는 교수에게 대답을 하고 지훈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관린에게 말을 걸었다.
"관린, 다음부턴 나 깨워서 같이가."
"미안해요. 자리 먼저 맡고 싶어서... 형 근데 뒤쪽 자리 괜찮죠? 우리 딴 짓 할 수 있어. 화난 건 아니죠? 정말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깨울게. 같이 나가자."
관린은 진심으로 미안하단듯 지훈의 어깨를 감싸며 작은 애교를 부렸다. 지훈은 방금 뛰어와서 진정이 덜 된 것인지, 저의 어깨와 팔을 쓸어내리는 관린의 손 때문에 더운 것인지 연신 손으로 부채질만 할 뿐이었다.
성공적인 수강신청 덕에 관린과 지훈은 겹치는 강의가 두개나 있었고 공강도 맞췄기에 등교부터 하교까지 비슷한 생활 패턴으로 지냈다. 아니, 등교 전부터 하교 후까지 거의 모든 생활 패턴이 비슷했다. 아침이면 관린이 먼저 일어나 지훈의 방문을 두드리고 5분뒤 방문을 열고 나오는 지훈.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깐 티브이를 보고 같이 양치하는 두 사람. 일상의 평화가 계속되는 날들이었다.
*
9월의 끝을 향하고 있는 그 날은 비가 왔었고, 아는 선배와의 약속에 밤이 되어서야 지훈이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들어온 터라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지 집안은 어두웠다. 지훈은 잠깐이지만 비를 맞기도 했고 늦은 시간이니 얼른 씻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훈이 방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을 때였다. 똑똑-. 형 저 관린이에요. 잠시 들어가도 돼요? 잠에 들지 않았었는지 방 문 밖에서 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들어와. 지훈은 방문을 직접 열어 관린을 안으로 들였다. 관린이 지훈의 방 내부를 본건 처음이었는지 눈짓으로 방을 훑어 보았다.
"어! 형 방은 침대네요."
"집주인 아들의 특혜 정도지. 앉아."
지훈이 웃으며 침대에 걸터 앉았고 관린에게 그 옆에 앉으라며 매트리스를 가볍게 두드렸다. 무슨 할말이 있어서 그런거야? 지훈의 질문에 관린이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내뱉었다.
"오늘 형 방에서 자면 안돼요?"
가타부타 다른 말도 않고 저의 방에서 자면 안되냐는 질문에 지훈은 관린을 바라보았다. 관린의 뽀얀 피부와 대조되게 유독 눈에 띠는 다크서클과 어딘가 할말이 있는 듯한 표정, 간절해 보이는 목소리에 지훈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여기서 자. 침대에서 자고 싶었던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지훈은 바닥에 깔 이불을 꺼내려 일어났다. 그 순간 관린이 지훈의 손목을 잡았다.
"침대에서 같이 자면 안돼요?"
"안돼. 좁아서 못자. 난 그냥 바닥에 이불깔고 잘게. 너도 침대에서 편하게 자."
"저 벽에 딱 붙어서 잘게요. 네? 응?"
그래 알았어. 너 다 씻은거 맞지? 불 끈다. 평소 작은 애교 정도는 부리던 관린이지만 이렇게까지 어리광을 피우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지훈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정말 관린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거라면 자신이 형으로서 돌봐주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문 너머 빗소리와 가로등 불만이 어두운 방안을 채웠다. 관린 잘자. 짧은 밤인사와 함께 잠에 들려던 지훈이었다. 이후 관린이 한 말 때문에 바로 잠에 들지는 못 했지만.
"사실 저 오늘 생일이었어요."
지훈은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다. 서로 마주 보며 누워 있던 터라 곧장 관린과 눈이 마주쳤다.
"왜 말 안했어?! 우리 엄마아빠는 알아? 미역국 먹었어?"
"제가 늦게 말하기도 했고, 형이 늦게 오기도 했고. 미역국은 못 먹었는데 케이크는 먹었어요. 상아누나가 사오셨거든요."
"아... 몰라서 미안해. 뭐 갖고 싶은거 있어? 아님 소원이라든가.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그러면 오늘 일찍 오는 건데."
"괜찮아요. 이미 소원 이뤘어."
이미 소원을 이뤘다던 관린의 말에 그제야 방금의 어리광을 이해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여름부터 같이 지내왔으면서 관린의 생일 한번 물어보지 않았다는게. 지훈은 팔을 뻗어 관린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관린의 등을 두어번 토닥였다.
"미안해 관린. 그리고 생일 축하해. 잘자"
"응. 고마워요 형."
지훈은 규칙적인 토닥임에 자신이 먼저 잠에 들 것만 같았다. 가물가물한 눈과 흐릿해지는 정신에 관린을 토닥이던 손도 차츰 느려져만 갔다. 좋아해 박지훈. 낮은 음성으로 저의 이름을 부르며 좋아한다던 고백이 관린의 목소리였는지, 창 밖의 빗소리였는지 지훈은 구분할 수 없었다.
*
이후 시작된 시험기간은 관린과 지훈을 갈라 놓았다. 같은 단과대 건물이긴 했지만 과가 달랐기에, 어쩌다 한번씩 열람실에서 마주칠 때가 다였다. 그때마다 관린은 지훈에게 초콜릿을 건내어 주었고 지훈 또한 관린에게 박카스와 같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보통은 각자의 공부에 전념하느라 밤이 되어서야 집에서 잠깐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것이 다였다. 그동안 계절은 가을을 넘기고 있었고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니 과제의 연속이었다. 특히 관린이 답사로 인해 일주일이나 집을 비웠기에 관린과 지훈은 더욱 각자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관린이 없는 동안 지훈은 방문 노크 소리 없이 일어나 준비를 하고 혼자 아침 강의를 들었으며 다른 친구들과, 혹은 혼자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그동안 지훈은 관린에 대해 생각했다. 지훈은 저를 잘 따르고 귀여운 동생이니 호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호감이란 감정의 형태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해 고민했다. 자신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려주는 관린, 집에서 티브이를 볼 때면 자리를 내 소파에 앉으라며 배려하는 관린, 저를 보면 늘 웃어주는 관린. 친하면 모두에게 다정한가 싶다가도 이따금 저를 향한 관린의 눈을 보면 다시 혼란에 빠지는 지훈이었다.
‘좋음’을 마음껏 표현하는 관린을 보며 이미 지훈의 본능은 눈치 챘을 것이다. 관린이 자신을 좋아한단 것을.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은 지훈에게 결론을 내어주었다. 지훈도 관린을 좋아한다고. 그날 밤 자신이 끌어안고 자던 베개를 내어주고 이불의 절반을 내어준다는 것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지훈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꼭 끌어안으며 자던 그날 밤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관린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리라 지훈은 생각했다.
*
관린을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관린이 집으로 돌아올 날이었다. 토요일 오전, 익숙한 목소리가 방문 너머 들렸고 지훈은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섰다. 관린은 지훈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며 둘은 지훈을 보지 못했는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아쉽네~ 당장 다음 달에 간다니... 갑작스럽긴 하다~"
"네 아주머니 저도 아쉬워요. 그래도 다음 학기 때는 돌아오니까요, 그때까지 방 비어있으면 또 여기로 올게요."
"어머 얘! 당연히 비워놔야지~ 섭섭하게 그런 소리를~"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지훈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누가 어딜가? 라이관린이 어딜가는데? 관린의 얼굴을 본지 일주일만에 다시 관린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지훈은 아무것도 모른 척, 방금 거실에 온 것처럼 뒤늦게 인기척을 냈다. 지훈을 발견한 지훈의 어머니는 아들, 일어났어? 엄마가 점심해줄게-라는 말과 함께 주방으로 사라지셨고 거실에는 관린과 지훈만이 남아있었다.
"형 오랜만이에요."
"어...응... 답사는 잘 했고?"
"네. 생각보다 보고서도 잘 쓴 것 같아요."
더 할 말이 없어진 지훈은 어색해진 분위기에 뒷목을 긁적이며 그래? 피곤할텐데 방에서 쉬어. 라는 말 밖에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그 날 지훈은-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관린이 떠난다면 하숙생들 중 저에게 가장 먼저 말 할 것이라 믿고 기다렸다. 그래서 하루종일 관린을 눈으로 쫓으며 관린이 말해주길 기다렸건만, 그 날 관린은 아침의 대화를 끝으로 지훈과 말을 하지 않았으며 끝내 지훈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
사정이 있어 12월부터 방을 비운다는 관린의 소식에 송별회가 있었다. 관린은 한사코 괜찮다며 이른 방학을 맞이하는 정도라고 거절했지만 정이 많은 지훈의 가족들과 하숙생들로 인해 작은 송별회를 열었다. 잘 다녀와, 건강 조심하고. 관린을 향해 걱정과 아쉬움이 묻어나는 인사들이 쏟아졌고 지훈은 짧은 인사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온갖 음식들이 있었고 소주와 맥주가 오고가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겼고 조촐한 송별회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나섰다. 송별회 내내 지훈을 의식하고 있던 관린 또한 따라 나섰다. 마당 한 구석에서 담뱃불을 붙이려는 지훈을 보고 관린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담배 피면 안되는데."
관린의 말을 들은 지훈은 그들의 첫만남이 생각나 가볍게 웃었고 이내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 그럼 피면 안되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리고 다시 정적. 서로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머뭇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건 지훈이었다.
"있지, 왜 방 비우는지 물어봐도 돼? 어디 가는 거야?"
"아 별 일은 없고 잠시 대만으로 가야 할 일이 있어서요. 비자 문제도 있고 집안 문제도 있고. 비자 문제는 좀 별 일인가? 암튼 잠시 다녀오는 것 뿐이에요. 바로 다음 학기에 오니까."
"아니, 잠시만. 비자? 무슨 말이야 그게?"
"저 대만에서 태어났어요. 몰랐어요 형?"
곧이어 관린은 한국에서 자란 것은 맞으나 원래는 대만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때까지 대만에서 보냈다고 했다. 저 그래서 군대 안가요- 관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벼운 농담을 건넸지만 지훈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좀처럼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다시 가라앉은 분위기에 관린이 당황한듯 형 많이 놀랐어요?라고 물었지만 고개를 떨군 지훈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관린, 한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
혹시 나 좋아해? 관린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 바로 질문을 던진 지훈의 눈동자에는 곧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관린이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훈은 관린의 마음을 알고 싶었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조급한 마음에 감정이 앞서 자연스레 눈물이 차올랐다. 난 너 좋아해. 떨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관린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빛만은 올곧았다.
"나 지금 취한 것도 아니고 잠깐의 느낌으로 내린 결론도 아냐. 그냥 널 보면서, 너랑 같이 있으면서 느낀거야. 관린아 내가 널 좋아해."
"형,"
"아냐. 지금 말 하지마. 나중에, 나중에 말해줘. 나 먼저 들어간다."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에서 놓고 지훈은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관린은 마당에 남아 지훈이 떨어트린 담배를 주워 들었다. 평소 담배를 피지 않은 관린이지만 오늘만큼은 담배가 절실히 필요한 밤이었다.
이후 지훈은 관린을 대놓고 피했다. 아침도 거르고 먼저 학교에 나섰으며 공부를 한단 핑계로 열람실에 있다가 밤늦게서야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다. 지훈은 끝내 관린이 떠나는 것을 보지 않았으며 그런 지훈에게 관린은 아무말 않고 그렇게 자신의 고향으로 떠났다.
*
일찍이 준비한 시험공부가 빛을 보았는지 지훈은 시험을 꽤 잘쳤고,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결국 종강을 하자마자 지훈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연말이라 여기저기서 지훈을 부르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지훈은 방 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그런 지훈을 보며 하숙집의 사람 모두가 걱정을 했다. 연말에 가기로한 지훈네 가족 여행은 결국 부부 여행이 되었고, 12월 31일까지 감기를 떨쳐내지 못한 지훈은 홀로 집을 지키게 되었다.
'집에 아무도 없네... 아무리 연말이라지만 다들 너무하다 진짜....'
넓은 식탁서 온기가 겨우 남은 죽을 먹은 지훈은 혼자라는 생각에 괜히 더 서러워졌다. 감기약을 먹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다시 누운 지훈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의 발걸음은 지훈의 방과 점점 가까워졌으며 이내 지훈의 방문을 열었다. 찬공기와 함께 들어온 발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관린이었다. 외투도 채 벗지 않고 곧장 지훈의 침대에 걸터 앉은 관린은 평소 여유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다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형 많이 아파? 어머니 전화 받고 급하게 택시 타고 왔어. 오늘 입국했다고 전화 드렸는데 형이 아픈데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고. 많이 아파? 약은 먹었고?"
지훈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약 기운과 잠 기운에 몽롱해서 제가 헛것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는 관린에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너.... 어떻게....."
"형 보고 싶어서. 그래서 빨리 왔어. 형이 나중에 말해 달라며. 근데 그 나중이 언제인지 모르겠고 난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말하고 싶었거든. 형, 나 너 좋아해. 나랑 사귀어 줄래?"
지훈은 정말 꿈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현실임을 인식하고 싶었다. 몸을 살짝 일으킨 지훈은 관린에게 손을 뻗어 관린의 뺨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조금 차가운 온도와 말랑한 촉감이 꿈이 아님을 증명했다. 누르고 있기만 하던 지훈의 입술 사이로 관린의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관린의 혀는 지훈의 치아 하나하나를 두드리고 혀를 옭아맸으며 지훈의 입천장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한참의 입맞춤 끝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달뜬 숨을 내쉬었다.
"사랑해, 박지훈."
"나도 사랑해, 라이관린."
저 멀리서 새해 카운트다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어두운 방안에는 두 사람의 온기가 가득했다.
1999년, 지구가 멸망한다던 노트라다무스의 예언은 틀렸고 디지털 전산이 다 망가져 전세계가 혼란에 빠진다는 어느 점쟁이의 말도 다 틀렸다. 늘 그렇듯 계절은 바뀌었고 사람들은 일상을 살았다. 그리고 여기,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이 있다.
새천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