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
그런 상상해본 적 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상상. 적당한 날을 고르고 골라,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 ‘좋아해.’라고 말하면 너는 오늘 고백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겠지. 이내 그 커다란 눈 가득히 사랑이 차오르고 수줍은 듯이 웃으며 ‘나도 네가 좋아.’ 라고 말하는 그런-……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상상 말이야.
미리 말해두지만 난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왜냐하면,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리가 없잖아.
진짜야. 저거 내가 한 상상 아니야.
나도 좋아해줘
written by 쿠
1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동아리방에 들어온 지훈이 대뜸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눈을 반짝이며 볼에는 홍조가 잔뜩 올라 붉어진 채였다. 제법 선선해진 날씨에 땀을 흘릴 정도라니 어지간히도 말하고 싶었나보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그런 지훈에게 잠시 시선을 준 관린이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이번엔 또 누군데?”
“이번에 교양 같이 듣는 형. 이번에 같은 조된 형인데, 이번 과제가 책 읽고 조별로 토론하는 거거든? 아니 근데 그 형이 교수님이 제시한 책을 이미 다 읽어봤다는 거야! 멋있지 않아?”
지훈의 말에 책장을 넘기던 관린의 손이 멈췄다. 그 자세 그대로, 시선을 올려 지훈에게로 향했다.
“…그러니까 지금,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서 좋아하게 됐다는 거야?”
“응? 그건 아닌데? 책도 많이 읽은 대다가, 키도 나보다 크고 겁나 잘생겼어.”
“아… 그래? 잘 되면 좋겠네.”
“오늘 같이 못 가. 형이랑 회의해야 돼서, 좀 걸릴 듯?”
지훈의 말에 관린이 뭐라 말하려던 순간, 지훈의 폰이 울렸다. 지훈의 얼굴이 불을 켠 듯이 환해졌다. 아까 말한 형인 가보지. 열었던 입을 꾹 다물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글자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정신은 온통 지훈에게로 쏠려 있었다.
“나 지금 가야되겠다. 형이 회의 지금 가능하녜. 빠이!”
동아리 방 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습관적으로 볼살을 씹으며 책에 적힌 글자를 노려보던 관린이 결국 책을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빠져나간 입 안이 썼다. 이번 학기만 해도 벌써 몇 번짼지. 처음엔 자신을 친절하게 도와줘서, 비 오는 날 우산 빌려줘서, 엠티에서 술 흑기사 해줘서,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모습이 멋있어서 등등 금사빠도 저런 금사빠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훈의 반하는 포인트는 날이 갈수록 사소해졌다.
“책 좋아하고, 키도 크고 잘생긴 사람 여기도 있는데…”
박지훈이 누군가에게 빠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한 순간이구나, 싶었다. 박지훈은 항상 빛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정말,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반짝거렸다. 박지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네 곁에 있을 수는 있어도 널 반짝이게 할 수는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끝도 없는 구멍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처음 깨달았을 때 박지훈하고 거리를 둬볼까도 생각해봤지만, 내게 있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거리를 둘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좋아하지도 않았겠지…
2
박지훈은 흔히 말하는 ‘금사빠’였지만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쉽게 타올랐을지라도 사랑이 쉽게 꺼지지 않는 편이었다. 오히려 상대방이 박지훈한테 질려하며 차이기 일쑤였다. 박지훈 본인이 차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높은 확률로 상대방이 본인에게 마음이 떠난 것을 깨닫고 이별을 고하는 경우였다.
천성이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는 편이기도 하고 눈은 감정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는가. 박지훈의 커다란 눈은 상대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사랑을 가감 없이 투영했고, 보통은 그 관심과 사랑을 부담스러워했다. 배가 부른 거지. 어리석은 거고.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서 그런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모르는 어리석음.
‘어리석음-’하고 생각한 순간 자조적인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구한테 어리석다고 하는 지.’
언제 시작된 지도 모르는 사랑을, 처음엔 사랑인줄도 몰랐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너무 무거워진 후라 손에서 놓지도 차마 잡지도 못하고 있는 주제에 누가 누굴 보고-.
그때 갑자기 내 심정을 대변하듯 하루 종일 무겁게 물기를 머금고 있던 하늘에서 결국 빗방울이 떨어졌다. 오늘도 우산이 없을 박지훈에게 전화하려다 다시 손을 떨어뜨렸다. 지금 연락하면 오히려 왜 방해 하냐고 역정을 들을 것 같았다.
“하…”
절로 한숨이 세어 나왔다. 어릴 때는 박지훈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어보겠다고 박지훈이 좋아할, 반할 행동들만 골라서 해본 적도 있었다. 신경 안 쓰는 척 무심하게 행동하다가도 지훈이 자신을 찾을 만한 순간에 나타난다거나 비 오는 날 우산을 자주 깜빡하는 박지훈을 위해 항상 가방에 우산을 가지고 다니다 비 오는 날 빌려주거나 하는 등등. 누가 봐도 자신에게 관심 있다는 티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박지훈 본인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곤 했다.
여름 장마가 한창이던, 오늘처럼 비가 갑자기 쏟아졌던, 바로 전날 박지훈에게 우산을 빌려주는 바람에 나도 박지훈도 우산이 없던 날.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멀건히 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나는 사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나를 자책하면서도 박지훈과 함께 있을 수 있음에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어딘들 천국일 때였으니까. 학교를 나서던 같은 반 친구에게 우산을 빌려 겨우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에, 나는 또 우리가 한 우산에 있음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말없이 집에 가는 길에 홍조로 붉어진 박지훈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지훈한테서 우산을 빌려준 친구에게 반했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진. 내가 우산을 빌려줬던 게 몇 번인데, 또 내가 아니라는 절망을 넘어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같은 행동을 해도 안 되는 놈은 안 되는 구나, 싶었다.
지금 기분이 딱, 그때와 같았다. 그날 느꼈던 비참함과 절망감이 나를 짓눌렀다.
3
교수님의 변덕으로 제비뽑기를 통해 조를 정하게 됐음에 내심 감사했다. 같은 과가 많았음에도 조를 같이 하자고 얘기할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샌가 라이관린이랑 함께 다니는 것이 당연시되어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낼 필요성을 못 느낀 것에 더해 낯을 가리는 성격이 합쳐진 결과였다. 그렇게 제비뽑기로 우연히 같은 조가 된 사람이 형이었다.
처음부터 형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조가 되기 전까진 형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강의 첫날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눈길이 갔다. 심드렁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던 형은 시끄러운 강의실에서 혼자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앉아있음에도 느껴지는 큰 키에 그 형은 어딘가, 라이관린을 떠올리게 했다. 외모나 성격, 심지어 전공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음에도 그 형을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라이관린이 생각나곤 했다.
같은 조가 되어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덥다고 생각했다. 괜히 딴청을 부리고 형이 하는 말의 내용보다는 형의 손동작이나 입모양에 눈길이 갔다.
“지훈아?”
20분 남짓한 시간동안 형이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부른 건지 모르겠다. 자꾸만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려 멍 때리며 집중을 못하고 있는 나에게 형은 화난 기색 하나 없었다. 다시 말해주며 어디 아프냐고 묻는 형의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형과 얘기하고, 형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도 왠지 계속해서 머릿속 한 켠에 라이관린이 있었다. 왜?
‘형 얼굴이 보고 싶고, 심장도 두근거리는 거 같은데……. 나 저 형한테 반했나봐! 이관린한테 말해줘야지!’
라이관린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동아리방으로 뛰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동아리방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나보다 수업이 먼저 끝나는 날에는 동아리방에서 책을 읽으며 나를 기다렸다.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4
그날 이후 박지훈은 어딘가 초조하게 핸드폰을 계속해서 들여다봤다. 강의실에서도, 동아리 방에서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거듭 핸드폰을 확인하다 실망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한번씩 얼굴이 밝아지며 핸드폰을 두드렸다. 때때로는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곤 했다. 강의시간에 조차 갑자기 사라져버린 박지훈을 대신해 짐을 챙겨 동아리방에 있으면 얼굴을 붉히고 조금 실망하면서 들어왔다. 내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뒷머리를 긁적이며,
“갑자기 배가 아프더라고…….”
“서면제출 과제 중에 제출 안 한게 있었지 뭐야…….”
“학교 냥이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따위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예쁘게 웃는 박지훈이었다.
‘저런 걸 핑계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속아주기에 자존심 상하는 이유를 대는 박지훈에 짜증이 나려다가도 매번 조금 실망한 듯이 들어오는 박지훈이 신경 쓰여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 형’을 만나러 갔다 왔으면서. 마음 같아선 멋쩍게 들어오는 박지훈을 붙잡고 왜 실망했냐고, 좋아하는 사람보고 왔으면서 왜 실망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때 되면 말해주겠지, 하며 참아 넘겼다.
5
형과 과제를 하면서 처음으로 조별과제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제를 위해 형이 추천해준 책을 읽고, 형과 만나 의견을 나누고 레포트를 작성하는 것까지 전부 즐거웠다.
내가 피곤해하는 것 같으면 형은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나 오늘 갔던 식당 같은 과제 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환기시켜주곤 했다. 내가 피곤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형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며 잠시 쉬자고 이야기 할 때 마다 다시 반하는 기분이었다.
형과 같이 있을 때면 이 형도 나를 좋아하나? 싶을 정도로 나를 신경써주는 느낌이 들었다. 길을 걸을 때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걷게 해준다거나, 길에 모난 것이 있으면 이야기를 해준다거나,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 가까이에 있으면 위치를 바꿔준다거나 하는 식의 배려를 받고 있자면 하기 싫어도 ‘나를 좋아할지도 몰라.’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그날분량의 과제를 끝내고 헤어지고 나면 형이 나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다음 약속도 정하고 헤어졌기에 연락할 구실조차 적었다. 10번 연락하고 싶은 것을 참아 1번 톡을 보냈다. 이런 식으로 항상 내가 먼저 톡을 보내 대화를 시작하고, 대화를 끝내는 것은 형이었다.
이런 서운한 것들을 라이관린한테 토로하고 싶었지만 요즘 라이관린의 상태가 이상했다. 금사빠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면 항상 뚱한 반응이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어딘가 이상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말을 숨기는 편도 아니었는데 최근의 라이관린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있었다. 라이관린은 요즘 그렇게 좋아하던 책도 읽지 않는 것 같았다. 가끔 오는 형의 연락에 신나서 형을 만났다 동아리 방으로 향하면 라이관린은 동아리 방문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처럼 문을 여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자리도 문을 마주보고 있는 자리에 앉아 턱을 괴거나,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있곤 했다. 줄곧 나를 기다렸다는 건 알겠는데, 나와 눈을 마주친 후 볼살을 잠시 씹었다가
“……늦었네. 가자.”
하고 말할 뿐이었다.
6
하루 종일 날이 잔뜩 흐렸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언제 비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오늘따라 수업이 일찍 끝나 동아리 방으로 향하다 우연히 편의점에서 형과 함께 있는 박지훈을 봤다. 커피를 손에 하나씩 쥐고 계산대 앞에 서서 서로 사주려고 했는지 둘 다 카드를 내밀고 있었다. 결국 박지훈이 이겼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계산한 뒤 다시 수줍은 표정이 되어 형에게 커피를 건네고 있었다.
둘이 편의점에서 나오려 하자 나도 모르게 뒤돌아섰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며 수줍어하고 있는 박지훈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박지훈을 다른 사람에 의해 알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행히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다음엔 꼭 저랑도 같이 가봐요. 저도 파스타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래, 다음에 꼭 지훈이 너도 데려갈게. 그럼 조심히 들어가.”
다시 몸을 돌려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헤어져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고 있는 형과 땅을 보며 걷고 있는 박지훈. 짜증이 일었다. 얼마나 대단하고 멋있는 사람인가 싶어 나도 모르게 그 형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박지훈하고 헤어진 형은 곧장 음대 건물로 향했다. 걷는 종종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보니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 듯 했다. 조금 뛰다시피 도착한 음대 앞에서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싶더니 곧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형의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갈색의 긴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설마…….’
누가 봐도 둘은 연인사이로 보였다. 특별히 연인으로 보일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둘이 맞잡은 손과 쳐다보는 눈빛과 그 분위기가 말하고 있었다. 박지훈은, 알고 있나?
‘형을 만나고도 시무룩하게 들어오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나?’
정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오만 생각이 드는 동시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박지훈에게 오늘 일이 있어서 늦을 것 같다고, 비가 올 것 같으니 먼저 가라고, 톡을 보냈다. 알았다는 답장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버스에 탈 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졌다. 집에 도착했나 싶어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톡도 보내봤지만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날, 박지훈은 예상대로 비를 맞은 모양인지 감기에 걸려서 학교에 왔다.
“열도 나는 것 같은데 쉬지 그랬어.”
“나 한 번 더 결석하면 F. 못 쉬어.”
힘없이 웃으며 말하는 박지훈은 감기로 열이 올라 발간 볼을 하고 목이 잔뜩 쉬어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박지훈은 정말 출석만 하려고 했는지 약 기운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책상 위로 올려놓은 핸드폰은 간간히 불빛을 반짝이며 알림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수업 끝났어, 지훈아. 집에 가자.”
“어? 응….”
잠에 취해 부스스 일어나는 박지훈의 볼에 붙은 프린트를 떼어 가방에 넣으려는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박지훈이 벌떡 일어나다 잠시 휘청거렸다.
“나, 가야 해.”
“어딜?”
“형이 지금 나 시간 있녜. 아이씨, 20분 전에 보낸 건데 지금도 시간 있으시려나?”
당장이라도 가방을 버리고 뛰어나갈 기세라 팔을 붙잡았다.
“방금도 휘청거렸으면서 어딜 가려고.”
“형이 부르잖아. 가야지.”
“가지 마. 가지 마, 지훈아.”
초등학생 때 이후로 이름만 부르자 순간 박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내 손을 잡고 떼어내면서 말했다. 박지훈의 손은 열이 올라 뜨거웠다.
“처음으로 형이 나한테 시간 있냐고 물었어. 매번 내가 우연인척 찾아가기만 했는데, 형이 나보고 만나자고 했잖아. 가야해.”
“지훈아, 그 형…”
“……”
“그 형…”
박지훈의 손을 덮으며 어제 봤던 걸 이야기해야 하나 싶어 입을 열었다. 내 입에서 형이 나오자 내 손을 떼어내려 잡고 있던 박지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을 꺼내고서도 그 얘기를 하는 게 맞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네가 좋아한다던 그 형…”
“알아.”
“…어?”
박지훈이, 알고 있다고?
“네가 하려는 말, 안다고. 그러니까,”
“그걸 알면서, 가겠다고?”
“……응.”
“지훈아, 제발……”
“……갈게.”
결국 박지훈은 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나갔다. 최악이었다. 아픈 사람을 불러내는 그 형이나 아프다면서도 고작 톡 하나에 달려가는 박지훈이나, 여자친구 있다고 말하려 했던 나까지. 모두 최악이었다.
밖에는 가을 장맛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 박지훈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 후로 이틀을 더 쉬고 나타난 박지훈은 감기가 다 낫지 않은 듯 기운이 없었다. 수업만큼은 열심히 듣던 박지훈인데 책상에 엎드려있기까지 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직 다 안 나은 거냐고, 좀 더 쉬지 그랬냐고 물었을 텐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수업이 먼저 끝나는 사람이 동아리 방에서 기다렸다 함께 돌아가긴 했지만 걷는 내내 말이 없었다.
“…안녕. 내일 봐.”
“응, 내일 봐.”
서로의 집으로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건네는 어색한 인사가 대화의 전부였다.
7
형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기는 쉬웠다. 형은 종종 맛집을 검색하고 있었고, 목걸이나 귀걸이 가튼 선물을 고르고 있었으며, 과제 도중에 통화를 하러 갔다 온 형의 표정은 조금 상기된 채 들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형이 내게 하는 행동들이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배려심 많은 성격에 기인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형이 연락 오면 어쩔 수 없이 기뻤고, 내가 보낸 톡에 수업이라 이제 봤다는 톡이 오면 우연을 가장해 만나러 가고 있는 내가 있었다. 라이관린이 계속 신경 쓰였지만, 난 형을 좋아하니까. 근데 왜…?
그날도 그랬다. 형이랑 그날 분량을 끝내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밥이라도, 먹으러 가실래요?”
“미안, 나 오늘 선약 있어. 친구랑 파스타 먹으러 가기로 했거든.”
짐을 챙기는 형의 들뜬 모습에 데이트 있다는 것을 눈치 챘던 날. 웬일로 라이관린이 나한테 먼저 가라고 톡을 보냈다.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고도 멍하니 동아리 방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집 가기 전에 한 번은 들릴 것 같은데, 그냥 기다리자 싶었다.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안 가져왔는데. 그칠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더 오기 전에 집에 갈까.’
건물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은 그새 더 굵어져 있었다. 차가운 비에 조금이라도 덜 젖으려 뛰어가다 앞에 걸어가는 형의 모습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형은 빨간색 우산을 어떤 여자와 나눠 쓰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여자 쪽으로 기울어진 우산과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형의 모습에 싫어도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여자친구 있었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확인 사살을 받으니 허탈했다. 내리는 비가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라이관린이, 보고 싶었다.
8
“지훈아, 기분 나쁜 질문일수도 있는데, 너 혹시 나 좋아하니…?”
“…네? 그럴 리가요.”
9
박지훈이랑 이렇다 할 대화를 못한 지 일주일, 나 자신이 한심하고 답답해서 밤 산책을 나왔다. 며칠 비가 내린 탓인지 하늘은 깨끗했지만 별이 하나도 뜨지 않은 채 캄캄했다. 박지훈에게 연락을 해볼까 고민하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며칠째 아무런 대화가 없었던 대화창을 열어 몇 번이고 톡을 지웠다 쓰기를 반복했다.
결국 톡을 보내지 못하고 일어서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박지훈이었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일어서서 전화를 받았다.
“응”
“……”
“……”
“……”
“…지훈아.”
불러도 대답 없는 박지훈에 끊겼나 싶어 핸드폰을 확인하려는데 건너편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나 차였어.”
“갈게.”
울음이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예전부터 박지훈의 ‘차였어.’, 혹은 ‘헤어졌어.’ 라는 말은 본인을 위로해달라는 신호였다. 어떻게든 사랑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다 결국 헤어지고 나면 박지훈은 내게 전화해 대뜸 ‘나 헤어졌어.’ 라고 말하곤 했다.
10
박지훈의 자취방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침대에 동그란 이불덩어리가 눈에 띠었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박지훈은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다. 침대 맡에 앉아 박지훈의 등으로 추정되는 곳을 가만히 토닥였다.
“또 누가 우리 지훈이 속상하게 했어?”
어린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이야기하자 박지훈이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울었는지 눈가가 붉었다. 머리를 쓰다듬자 입을 삐죽거리던 박지훈의 눈에서 결국, 도르륵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 왠지 포기가 안 됐어…”
“응”
“처음부터 그 형하고 사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고, 사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두서없이 말하는 박지훈의 눈물을 닦아주며 얘기를 들었다. 박지훈이 말을 멈추자 침묵이 흘렀지만 이번에는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박지훈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좋았다. 박지훈이 다시 입을 다물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이고 돌멩아… 그만 울어. 우니까 못생겼어.”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말에 뭐라 말하려다 발끈하며 박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위로하라고 부른 친구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 괜히 울컥한 모양이었다.
“언제는 예쁘다며!”
그날따라 박지훈이 더 예뻐 보였다. 잠시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자 박지훈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나 진짜 울면 못생겼어…?”
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달고 말하는 박지훈이 필요 이상으로 귀여웠다. 1시간 전까지만해도 날 우울하게 만든 박지훈이 너무 귀여워 하마터면 박지훈의 얼굴을 당겨 키스할 뻔했다. 참아내며 말없이 눈물을 닦아주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니야. 지훈이 예쁘지. 누가 못생겼대.”
내 말에 눈이 동그래진 박지훈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감기가 덜 나은 건가 싶어 물어보려는데 박지훈이 벌떡 일어나더니 현관으로 향했다.
“ㄴ, 나 집에 갈래!”
박지훈의 귀가 잔뜩 빨개져있었다. 이제 와서, 귀엽게.
“여기가 네 집인데 가긴 어딜 가.”
“몰, 몰라, 간다면 가는 거야!”
당황해서 신발에 발을 끼우지 못하고 헛발질을 하고 있는 박지훈을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잡아 돌려세우자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귀는 불타고 있었다. 오늘인가? 오늘하면 되나?
“……”
“…오늘 이 말하는 거 진짜 쓰레기 같은데, 해도 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와중에도 내 말에 궁금해졌는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가리고 있는 손은 내리지 않은 채 손가락 사이로 나를 올려다봤다.
“뭔데? 해.”
“좋아해.”
갑작스런 고백에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박지훈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활짝 웃으며, 한 번 더 말했다.
“좋아해.”
귀만 빨갰던 박지훈이 볼을 시작으로 온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11
사실, 저거 내 얘기 맞아. 그리고 언제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것이 현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