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경

에트(‪@0199_Et‬)






비가 눈 앞을 가릴 정도로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대학교 4학년들은 졸업 작품에 매달려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나와 라이관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매주 꿀과 같은 토요일 일요일까지 반납하고 비에 홀딱 젖어서 학교에 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나는 미대고 라이관린은 음대였다. 라이관린이라는 청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신입생 때로 시간을 거슬러 가야지. 관린의 말로는 대만에서 한국에 온 뒤 얼마 안 되어서 한국 구경도 제대로 못 해 보고 입학식에 왔다고 한다. 그때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는 날 처음 보고 첫눈에 반해 이리저리 수소문해 내 과가 어디인지 알아내었다고 하는데. 이름은 왜 알아내지 않았냐고 묻자 그건 직접 나한테 묻고 싶었다고 한다. 이름을 말하는 그 목소리와 온도를 느끼고 싶었다나 뭐라나. 애초에 나는 라이관린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입학 전부터 올라온 남신이자 음대 작사작곡 천재 라이관린. 캠퍼스를 장악한 잘생긴 신입생을 누가 모르겠는가.

 

아무튼 생각보다 행동파인 라이관린은 날 만나기 위해 미대 건물까지 찾아온 아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강의를 들으러 갔던 날 강의실에 들어오기까진 성공했지만 신입생 때의 난 친구도 없고 과 단톡에도 들어가 있지만 대답이나 질문도 보내 본 적 없는 조용한 아싸일 뿐이었다. 이따금 처음 보는 여자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잘생겼다며 말을 걸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탓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인사 정도만 끝내고 그냥 보낸 적이 대다수였다. 나는 어색한 웃음에 입꼬리가 경련이 날 정도가 됐을 때였다.



"안녕."



이번에도 누군가 나한테 인사를 했다. 주변이 웅성거리는 걸 보니 이목이 여기로 다 집중이 됐구나 싶었던 나는 울상을 지으며 서둘러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놀라 입을 벌렸다. 이번엔 미대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아닌 신입생 에타남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어? 너는.



"나는 라이관린이야. 넌 이름이 뭐야?"



인사도 끝내기 전 바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며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다니 상당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구나 싶었던 나는 박지훈이야. 라고 말했지만 갑자기 드는 억울함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아무리 아싸라고 해도 라이관린을 모를 리가. 근데 얘 음대 아니었나? 왜 미대 건물에. 나는 인상을 쓰며 의아해 하자 관린은 활짝 웃으며 내 표정을 보고 다 안다는 듯이 너 보러 온 거야. 라고 말했다. 나는 크게 눈을 뜨며 나? 하자 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너도 유명하잖아. 에타에도 우리 둘 얘기 되게 많은데 몰랐어? 라고 말했다.



"내 얘기가 있다고?"



"그럼. 이번 미대 신입생 갈색 머리 남자 엄청 잘생겼다고 이름 뭐냐고 항상 올라왔잖아."



나는 그때 알았다. 에타를 둘러보긴 해서 그 글들을 한 번쯤은 봤었는데 그게 내 얘기였다니. 황급하게 에타에 들어가 그 글의 댓글들을 보니 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익는 것 같았다. 라이관린은 내 모습에 푸핫 웃으며 보조개를 만들더니 박지훈 박지훈 내 이름을 되뇌다 웃었다. 이름 예쁘다, 지훈아.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고 관린은 그런 내 동그란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오늘 시간 돼? 시간 있음 나랑 밥이나 먹자."



"어... 그래"



관린은 뜬금없이 밥을 먹자며 약속을 걸어왔다. 거절을 잘 못 하던 나는 관린의 불도저 같은 친화력에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얼떨결에 밥 약속에 응한 나는 관린이 간다고 등을 돌린 순간에 후회했다. 쟤랑 어떻게 만나냐고. 지훈은 머리를 쥐고 끙끙 앓았지만 관린의 마지막 말에 조금은 웃음이 났다. 드디어 첫 친구가 생긴다.



"지훈아, 꼭 보자."



친구는 무슨. 영악한 뱀 같은 라이관린은 처음부터 날 꼬실 생각이었다. 통성명을 한 날부터 패기의 신입생 라이관린은 끊임없이 나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라이관린의 모든 것에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연애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했던 나는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잘생긴 에타 남신에게 코가 꿰였고 나는 라이관린과 친구로서가 아닌 연인으로서 만나게 되었다. 신입생 때부터 졸업 학년인 4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관린과 조금씩 다투거나 의견이 부딪히는 일은 꽤 있었지만 그런 일로 인해 헤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관린이 지고 넘어가 주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그것을 보고 사랑의 힘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해 왔지만 지훈은 알고 있었다. 관린이 자신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회상하다 보니 꽤 멀던 캠퍼스도 쉽게 도착했다. 나는 관린에게 도착했다는 문자 하나를 간단하게 보내고 건물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가 졸업 작품을 위해 학교에 간다고 하니 관린은 자신은 졸업 작품을 다 완성했으니 구경하고 싶다며 자신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귀찮고 비도 오는데 집에 있으라고 자신도 거의 다 완성했다며 거절해도 완강하게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관린을 말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관린과 미대 건물 앞 벤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찍 온 나는 먼저 건물에 들어가 앞치마를 매고 채색할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먼저 도착했다는 내 문자에도 관린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고 결국 졸업 작품작을 꺼내 채색을 시작할 때까지 관린은 내 문자에 대답하지도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나는 결국 유화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관린에게 전화했다. 생각보다 오래 이어지는 연결음에 나는 아직도 관린이 자고 있었나 싶어 전화를 끊으려고 했을 때였다.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관린아, 늦잠 잔 거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나는 평상시와 다른 목소리를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자다 일어나 목소리가 갈라진 줄만 알았다. 하지만 내 말에 대답은 늦잠 잤다. 미안하다. 가 아닌 자신은 구급대원이고 방금 말한 관린이라는 분은 현재 교통사고를 당해 위급하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인지... 교통사고라니요?”

 

나는 믿을 수 없어 자신을 구급대원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번 되물었다. 친구랑 하는 장난인가 싶었다. 나는 장난치지 말라며 관린아, 장난이지? 라고 물어도 휴대폰 너머에서는 장난이 아닌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라고 했다. 운전자가 술을 먹고 운전하다 빗물에 차가 돌면서 그쪽으로 지나가던 관린을 쳤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정신도 없이 눈물이 마음대로 후두둑 떨어졌다. 하늘도 진실이라는 듯 천둥을 콰광하고 내리쳤다. 들어도 들어도 정말.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는 혹시 보호자라면 병원으로 와 달라고 했다. 나는 정신도 없이 건물에서 나와 뛰기 시작했다. 우산을 쓸 정신도 없었다. 울면서 캠퍼스를 뛰어나오니 주변에 택시라곤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하필 왜 이럴 때만 없고 지랄이냐고.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다리를 움직여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울면서 뛰어서 그런 건지 숨은 더 빨리 차고 다리도 후들거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온몸이 다 젖어 축축했지만 마음이 더 축축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왜 하필 이럴 때 택시가 잡히지 않는 거고. 왜 하필 이런 일이 관린이한테 일어나는 거고. 나는 하늘을 원망했다. 믿지도 않는 신을 미워했다.



겨우 잡은 택시 안에서 나는 비에 잔뜩 젖어 입술을 덜덜 떨며 택시 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가달라는 말밖에 못 하는 사람처럼 같은 말만 뱉었다. 내 상태를 본 기사 아저씨는 조용히 엑셀을 밟았다. 병원 앞에 도착한 택시에 나는 지갑 안에 있는 현금을 전부 꺼내 기사 아저씨께 던지듯 드리고 차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나는 그대로 발을 멈추지 않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관린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나는 잔뜩 겁을 먹었고 머리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생각. 내가 없는 사이에 날 두고 가지 마. 응급실 안에 도착하자마자 간호사를 붙잡고 라이관린이라는 남자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날 친절히 관린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었고 후들거리는 내 다리는 간호사를 따라 움직였다.

눈앞에 라이관린이 보였다.



“관린아!!!”



앞에 다 와서 네 이름을 외쳐도 크게 반응이 없었다. 그 순간 학교에서부터 흐르던 눈물이 더 많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본 관린은 그냥 피로 범벅이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했던 그런 과장된 모습. 그 모습을 관린이 하고 있었다. 분명히 날 만나러 오기 위해 깔끔하게 입었을 옷은 이리저리 찢어지고 피로 물들어 엉망이었다. 후들거리던 다리는 관린의 모습을 본 순간 무너져 더 이상 관린의 앞까지 걸어갈 수 없었다. 나는 관린에게 다가가기 위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꺽꺽. 우느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온 길고 하얀 관린의 손을 붙잡았다. 아주 조금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는 관린의 손가락을 느끼며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렇게 너를 보내야만 할까, 관린아.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한 관린은 불귀객이 되었다는 소식이 귀에 들렸다. 그 소식을 집에서 들은 나는 관린의 장례식을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가 맞을 것이다. 나는 좋지 못한 선택을 하고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관린이 없는 세상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관린의 장례식에 내가 하도 오지 않자 동기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내가 나오지 않자 동기는 뭔가 이상해 도어락을 풀고 들어왔고 집을 둘러봐도 내가 없어 마지막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거기서 욕조에 길게 늘어져 붉게 물들어 있는 날 보았다고 한다. 동기는 바로 119에 신고해 나는 병원으로 이송됐고 겨우 숨이 붙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동기가 누워있는 나에게 역시 어떻게든 살 사람은 살 운명인가 보다. 라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런 생각을 했다.

라이관린과 내 운명을 바뀌었다면. 신이 있음 장난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바뀌게 해 달라고.

 

-

 

꿈에 라이관린이 나왔다. 지훈은 잠에서 깨 몸을 벌떡 일으켜 쉬어지지 않는 숨을 크게 쉬었다 뱉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밖에서는 그날처럼 비가 쏟아지고 보지도 못했던 교통사고 당하기 직전의 라이관린이 자꾸 지훈의 머리에서 아른거렸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인해 형체를 잃은 관린이 고개를 돌려 지훈을 쳐다보는 그 순간 항상 지훈은 꿈에서 깨 일어났다. 너무 괴로웠다. 관린을 그렇게 잃고 나서 항상 지훈은 같은 시점 같은 모습인 관린을 꿈에서 마주했다. 처음에는 눈물만 나오지 않았다. 사랑을 잃은 아픔과 절망감이 지훈의 목을 조였고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정신이 피폐해졌다. 어느덧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꿈에 지훈은 무릎을 당겨 고개를 숙였다. 밖에서 끝도 없이 내리는 비가 원망스러웠다.

 

관린이 없는 세상은 관린이 살아있을 당시처럼 빠르게 굴러갔다. 4학년들은 졸업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허덕였고 나머지 학년들도 각자 제 할 일들을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지훈은 관린이 떠난 뒤로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학교 동기들에게 연락이 계속해서 왔지만 그것도 시간이 조금 흐르자 연락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훈은 맘 먹고 오늘 학교를 나가보기로 했다. 하지만 캠퍼스에 도착하자마자 지훈은 후회했다. 자신만이 캠퍼스 안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을 캠퍼스에 들어서면서 깨달았다. 하지만 나온 김에 하나라도 들어보자는 마음이 들어 관린과 함께 듣던 교양 수업 강의실 문을 열자 함께 지내던 동기들이 보였다. 하지만 지훈은 그들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웃을 수 없었다. 관린이의 마지막을 함께 울어 주던 모든 이들이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을 지훈은 알았지만 하하호호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지훈은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자신도 잘 몰랐다. 그저 저 동기들 중간에 관린이 함께 웃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울컥울컥 목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어, 지훈아!! 오랜만이다. 학교 이제부터 다시 나오는 거야?”

 

“아... 그...”

 

강의실 앞에 서 있는 지훈을 본 동기가 지훈에게 반가움을 표시하며 몸이 많이 말랐네. 지훈아 이따 우리랑 수업 끝나고 밥 먹으러 가자. 하며 친근하게 다가오자 지훈은 뒤로 주춤하며 등을 돌렸다. 도저히 저 상냥한 말에 웃으며 장난스럽게 답을 해 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훈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지훈은 자신이 저곳에 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캠퍼스에서 빠져나가 어느 한 곳도 들리지 못하고 집으로 곧장 들어갔다. 관린의 없는 세상은 여전히 지훈과는 어색했다.

 

오늘도 창문 밖에서 비가 쏟아졌다. 비가 올 계절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없이 내리는 비는 라이관린을 생각하게 했다. 지훈은 빗소리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 바로 앞에 있는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장 안에는 하얀 알약이 들어있는 통만이 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은 서랍에서 통을 꺼내 알약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지훈에게 이 하얀 약은 가끔 관린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악몽 속에서 도망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지훈은 무거운 몸을 옮겨 침대로 곧장 걸어갔다. 침대에 눕자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아, 오늘만큼은 행복했던 자신과 관린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신에게 빌었다. 한 번만이라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행복했던 우리의 보고 싶다고.



“헉!!!”



또다시 같은 꿈을 꾸었다. 하지만 조금 달라보였다. 차에 치이기 직전인 관린이 보이는 것은 똑같았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형체를 잃어버린 관린은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올라왔다. 지훈은 벌떡 일어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전처럼 쉬려고 컥컥거리며 노력했다. 식은땀이 밖에서 쏟아지는 비처럼 흘렀다. 물을 마시기 위해 무거운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늘 조용하던 지훈의 휴대폰이 벨소리로 시끄러웠다. 지훈은 소음과 비숫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같은 과 동기인가 싶어 손을 뻗는 순간 끊어진 전화에 휴대폰을 들어 화면에 뜨는 이름을 본 순간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발신자 라이관린 (1)

 

부재중의 주인은 라이관린이었다.

 

지훈은 딱딱하게 굳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숨을 계속해서 고르며 달달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다시 봐도 관린에게서 온 전화였다. 카톡에 들어가자 보이는 관린의 카톡 새메세지였다. 지훈은 급하게 대화창에 들어가자마자 경악했다. 날짜가 관린이 사고당하기 이주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훈은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캘린더에 들어가 다시 한번 봐도 딱 이주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지훈의 자취방 도어락을 풀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급하게 방에서 빠져나와 현관을 보자 입을 틀어막고 울 수밖에 없었다.



“지훈아, 왜 전화 안 받아? 밖에서 기다리다 비 다 맞았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지훈아,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비에 흠뻑 젖어 젖은 머리와 옷을 털고 있는 관린이 지훈의 눈에 보였다. 이게 실제인가? 꿈은 아닌가? 지훈이 자리 그대로 주저앉아 혼돈에 빠졌을 때였다. 관린이 지훈의 인기척을 느끼고 비 참 많이 온다. 하며 옷을 털다 굳은 지훈을 보고 의아해했다. 관린은 굳어 아무 말도 없는 지훈을 보고 당황하며 다가가 이마에 손을 댔다.



“지훈 왜 그래? 어디 아파?”

 

관린은 지훈이 아픈가 싶어 비에 젖은 손을 털고 이마에 가져다 댔지만 열은 없었다. 열은 없는데? 지훈은 멀쩡히 살아 자신을 걱정하는 관린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저 꿈인 줄 알았는데 관린을 보니 진짜 현실인 것 같다. 지훈은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비냄새에 섞인 관린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자 지금이 현실이야 라고 신이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미안, 관린아. 나가 줘.”



지훈은 눈물에 목이 잔뜩 메 나오지 않는 소리를 꾸역꾸역 꺼내어 힘겹게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관린의 얼굴이었지만 정작 관린을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장 붙잡고 엉엉 울고 싶은 마음 보고 싶었다고. 왜 자신을 두고 갔냐고. 원망하고 싶은 마음. 차오르는 좋아하는 마음. 여러 마음이 섞여 지훈을 괴롭혔다.

 

“뭐?”

 

“오늘은 그냥 나가 줘, 관린아. 제발.”

 

관린은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지훈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관린은 지훈의 이상한 행동에 팔을 붙잡고 물었다. 지훈은 힘없이 붙어있던 관린의 손을 잡아떼어냈다. 제발 나가 줘. 그냥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나가 줘. 지훈은 관린을 현관 앞으로 조금씩 밀어냈다.



“오늘 이상해, 박지훈. 너.”

 

관린은 지훈이 밀어내는 그대로 현관까지 밀려나면서도 지훈의 이상함을 계속 이상하게 여겼다. 자신을 보자마자 굳는 박지훈, 손을 대자 우는 박지훈. 그리고 울면서 나가라는 박지훈. 어제와 다르게 오늘 본 박지훈들은 너무 이상했다. 관린은 결국 지훈을 이기지 못하고 신발을 신고 집에서 나갔지만 분명 나가서도 자신이 걱정돼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을 관린을 지훈은 알기에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현관문에 기대어 숨죽여 울었다. 지훈은 이런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결국 다시 돌아와도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을 믿지 못해 이기적으로 변하는 자신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숨어서 지낸 지 이틀이 지났다. 이틀간 관린에게 괜찮냐고 왜 연락을 받지 않느냐고 제발 한 번만 봐 달라고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 결국엔 왜 자신에게 이러냐는 화가 담긴 연락이 왔지만 지훈은 카톡, 문자, 전화 모든 SNS로 연락하는 관린을 모르는 척했다. 끝까지 연락이 안 되자 관린은 지훈의 집을 다시 찾아왔다. 초인종을 누르는 관린의 소리, 문을 두드리다 안 돼 현관문에 기대 주저앉는듯한 관린의 소리가 들렸다. 도어락 번호도 알면서 문을 두드릴 뿐인 관린에 지훈은 현관에 앉아 다리를 모아 눈물만 흘렸다. 다시 한번 카톡 소리가 방 안에서 울렸고 관린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웅크린 몸을 피고 일어나 휴대폰을 들었다.



현관문에 검은 봉투 걸어놨어. 그거 약이니까 아프면 그거 꼭 먹어, 지훈아.

 

지훈은 잠금화면에 뜬 관린의 다정한 카톡에 결국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꾸역꾸역 삼키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고리에 걸린 검은 봉투 안에는 감기약 두통약 진통제··· 어디가 아플 때 먹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 약들까지. 봉투 안에 약 상자들이 가득했다. 여러 약국을 들러 약 전부를 달라고 했을 관린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지훈은 약 상자를 쥐고 당장 왔던 거리를 다시 되돌아서 가고 있을 관린에게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미래의 박지훈이지 지금의 박지훈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본인이라고 해도 다른 건 다르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는 마음부터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박지훈은 라이관린과 함께 행복하게 캠퍼스를 만끽하고 있어야 했는데. 내가 나타나서...

 

지훈은 과거로 돌아오고 악몽을 꾸지 않았다. 심지어 몸이 개운할 정도로 푹 잠에 빠져 어제는 늦잠까지 잤다. 지훈은 몸도 개운하고 아무리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고 쳐도 학교는 가야하지 않겠나 싶었다. 관린에게는 다가갈 수 없지만 학교 정도야 싶었다. 지훈은 침대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교양 하나던가... 전공도 있었나... 학교에 오래 나가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표를 생각하며 세면대 앞에 서자 보이는 것은 지훈 자신의 핑크색 칫솔과 누구의 것인지 딱 봐도 알 것 같은 초록색 칫솔이 눈에 보였다.

 

지훈은 자신의 칫솔을 물고 고민도 없이 초록색 칫솔을 잡아 휴지통으로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휴지통 안으로 버리려는 순간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지훈은 멈칫했다. 함께 자고 일어나 눈도 다 못 뜬 상태로 이를 닦다 서로의 모습을 보고 푸하하 웃던 자신과 관린의 모습이 눈앞에서 잔상처럼 지나갔다. 지훈은 눈을 질끈 감고 관린의 칫솔을 제자리에 다시 꽂아놓았다.

 

어떻게 가기 싫은 날은 준비가 이렇게 빨리 끝나는 거지?

 

지훈은 투덜투덜 가방을 챙기며 현관문 앞에 섰다. 학교쯤이야 갈 수 있지. 할 수 있다, 박지훈. 지훈은 힘을 한 번 쭉 내고 현관문을 열었다. 원래 같았으면 계단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관린이 있었겠지만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텅 빈 계단일 뿐이었다. 약을 걸어놓고 돌아간 날 이후로 관린은 지훈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지훈은 그 부분을 씁쓸하게 여겼지만 자신이 내친 거니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지금은 자신의 눈에서 벗어났지만 관린이 살아있음으로 인해 지훈의 세상은 예전으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지훈은 학교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봤다. 미래에서 왔지만 돌아가는 꼴은 똑같았다. 바쁘게 건물로 들어가는 학생들이나 커피를 들고 여유를 즐기는 학생들도 보였다. 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교양 하나뿐이었다. 괜히 전공 책을 들고 왔나 싶은 지훈은 살짝 울상을 지었다. 전공 책 존나 무겁네. 폰에 에타 시간표도 있었는데 그거 한 번이라도 보는 건데. 지훈은 무거운 책 탓에 아픈 어깨를 두드리며 강의실에 도착했다.

 

"박지훈! 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지훈은 자신이 지각이라며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떨었다. 과거로 오기 전에 자신과 대화했던 그 동기였다. 지훈은 뒤로 주춤주춤 발을 뗐다. 다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지훈이 등을 돌리며 발을 뗀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고 중심을 잃은 지훈이 휘청이자 부딪힌 사람이 꽉 붙잡아 주었다.

 

"아, 죄송합..."

 

지훈은 깜짝 놀라 사과했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훈의 어깨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지훈은 이상함에 위를 쳐다보았고 상대방은 모르는 사람이 아닌 라이관린이었다. 관린은 깜짝 놀라 커진 눈으로 지훈을 보고 있었다. 지훈은 상대방이 관린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어깨를 잡고 있는 관린의 손을 때어내고 가방을 고쳐맸다. 고마워.

 

“지훈아.”

 

관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관린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관린을 지나쳐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학교를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지훈은 인상을 찡그리며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계단에 도착했을 때였다. 지훈의 손목이 아프게 붙잡혔고 악 소리를 내며 돌아보자 화가 잔뜩 나 보이는 관린이 보였다. 이렇게 화가 나 보이는 관린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왜 이래, 박지훈. 왜 나 무시하는 건데? 연락은 왜 안 보고.”

 

“관린아, 그만.”

 

이 손 좀 놓아 줄래. 아프니까. 지훈은 화가 잔뜩 나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있는 관린의 손을 힘을 줘 떼어내고 계단을 내려갔다. 따라오지 마. 지훈은 경고하듯 관린에게 쌀쌀맞게 얘기하자 관린은 지훈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지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가 중요했다. 지훈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건지 관린은 도저히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관린을 뿌리치고 학교를 뛰쳐나온 지훈은 어디 한 곳도 들리지 않고 바로 집으로 왔고 씻자마자 이불 안으로 들어가 자기 자신을 달래느라 바빴다. 관린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은 다 관린이를 위해서야. 날 위해서가 아니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되뇌이기만 했던 지훈은 늦은 저녁이 된 줄도 몰랐다. 쾅쾅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훈은 놀라 이불 안에서 나와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았다. 이 시간에 누구 올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지훈은 의아해하며 현관문 앞으로 뛰어갔다.

 

“누구세요?”

 

“아, 지훈아... 문 좀 열어 줘...”

 

늦은 저녁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던 사람은 그토록 피해 다니던 관린이었다. 밖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관린의 목소리를 들으니 발음이 뭉개지고 혀가 꼬인 듯 웅얼웅얼거리고 손이 미끄러졌는지 현관문이 주욱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주량을 넘겨 술을 먹었나 보다. 지훈은 집에 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생각을 고치고 택시를 태워 관린의 자취방으로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지훈이 딱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 돌릴 때였다.

 

지훈아, 제발.

 

지훈은 저 몇 마디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냥 현관문을 확 열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술주정을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제발... 제발... 울음이 관린의 목에 눌려 먹히는 소리였다. 바로 앞에 보이는 관린은 술을 꽤 많이 먹기는 했는지 술 냄새가 가장 먼저 지훈을 반겼다. 단정하고 흐트러짐없던 관린의 모습이 저렇게 망가진 것을 본 지훈은 울컥해 왜 왔냐고. 들어올 거면 도어락 번호도 알면서 왜 열어달라고 하냐고. 관린에게 물었지만 관린은 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그 상태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훈은 관린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한숨을 쉬고 일단 관린을 집에 들이기 위해 관린의 팔을 붙잡고 일어나 신발장까지 끌고 왔다. 이미 지훈의 머리속엔 관린을 자취방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갔을 때였다.

 

“어어... 어!!!”

 

그때였다. 고개를 든 관린이 지훈을 그대로 밀쳐 아래에 두고 위에 올라탔다. 지훈은 갑작스러운 관린의 행동에 놀라 굳은 상태로 관린을 쳐다보았다. 마주 본 관린의 눈빛은 몇 번 본 적도 없는 찬 눈빛이었다. 어느 정도 무엇 때문에 관린이 술을 마셨는지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안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관린의 눈을 보고 느꼈다. 관린은 그런 생각을 하는 지훈의 속을 모르는지 눈을 맞추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누가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훈은 관린을 보던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관린을 부르기 위해 입을 떼자 뜨거운 무언가가 지훈의 볼로 뚝뚝 떨어졌다. 지훈은 깜짝 놀라 떨어진 곳을 보자 관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관린이 울고 있었다.

 

“...”

 

“지훈아... 너 나 왜 피해? 내가 싫어졌어?”

 

“관린아.”

 

“어?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줘, 지훈아. 나 정말 죽을 것 같아.”

 

관린은 자신을 부르는 지훈을 알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훈은 죽을 것 같다는 자신의 말에 눈을 커다랗게 뜨다 입을 꾹 닫았다. 지금의 자신은 관린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관린은 그런 지훈을 계속해서 재촉했지만 그래도 대답이 없자 뚝뚝 흘리던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리며 몸을 옆으로 웅크려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내가 미안해. 지훈아, 내가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하니까...”

 

“...”

 

“나 버리지만 마. 내가 더 잘할게, 지훈아. 제발.”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가슴을 찌르고 도망치는 것 같았다. 잘못도 없는 자신을 자책하는 관린이 손을 빌며 울자 그것을 본 지훈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미안함과 함께 크게 터뜨렸다. 지훈은 자신도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는 다리를 일으키다 안 되자 기어가 우는 관린의 볼을 잡고 떨어지는 눈물을 족족 닦아내었다. 울지 마. 울지 마, 관린아. 울지 마, 제발. 미안해. 내가.

 

“내가 널 어떻게 버려. 내가 미안해, 관린아. 뚝 그쳐, 어?”

 

지훈은 달래보아도 달래지지 않는 관린의 모습을 눈물을 닦고 보았다. 평소에는 크고 듬직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자기를 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우는 관린의 모습을 보니 작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너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다정한 버팀목이었던 관린이기에 크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늘 안일하게 대했다. 결국 너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으면서 날 위해 버팀목인 척하고 있었구나, 관린아.

나는 과거에 와서야 알았다. 너무 늦은 거겠지.



지훈은 계속해서 우는 관린을 안고 생각했다. 관린이 더 망가지기 전에 이 얘기를 해야겠다고. 내가 미래에서 온 지훈이라는 것을.

 

늦은 저녁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아침이 되자 지훈은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옆을 보니 엎드려 자는 관린이 보였다. 보고 싶었던 이 얼굴. 지훈은 관린의 머리를 살살 만지다 매끈한 이마로. 더 밑으로 내려가 맘고생에 수척해진 뺨으로.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 관린을 대했다. 관린은 만져지는 느낌에 눈을 살짝 떴고 바로 앞에 보이는 지훈에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아무래도 관린은 어제의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았다.

 

“뭘 그런 눈으로 봐. 네가 어제 술 먹고 우리 집에 왔잖아. 완전 엉엉 울었는데.”

 

“...”

 

“기억 안 나지? 라이관린 생각보다 울보네.”

 

관린은 지훈의 말에 귀를 빨갛게 물들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꿈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했던 짓이라니.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지훈은 그런 관린을 보고 푸스스 웃었다. 모든 걸 내려놓으니 관린을 다시 보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나나 나는 나니까. 어제의 관린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훈은 이불을 정리하며 관린에게 밥이나 먹자고 했다. 숙취 장난 아니겠는데, 라이관린. 아, 하지 마. 아, 햬쟤먜~ 박지훈, 너 진짜. 관린은 벌떡 일어나 놀리는 지훈의 머리통을 깨물었다. 악!! 아파!! 그니까 누가 놀리래? 둘은 와하하 웃기 시작했다. 웃어본 게 언제더라. 지훈은 오늘이 생각보다 더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야, 그만 일어나. 아침이나 먹자.”

 

“오, 박지훈이 해 주는 거야? 사랑의 아침밥 뭐 이런 거?”



“웃기고 있네. 네가 해야지, 솔직히.”



지훈은 어제 네 술주정 받아 주느라 죽을 뻔했는데. 하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관린에게 말했다. 관린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하며 고개를 젓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지훈도 관린을 따라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를 뒤지는 관린에 우리 집에 뭐가 있더라 고민하는 지훈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린은 냉장고 안을 뒤지느라 바빴다.

 

관린이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주었다. 역시 요리는 라이관린이지. 지훈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관린이 자신의 앞까지 내밀어준 오므라이스를 한 입 먹었다. 관린이 만들어준 음식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애초에 음식을 입 안에 넣었던 게 오랜만이기도 했다. 예전부터 관린은 요리를 잘했고 지훈은 요리만 하면 태워 먹어 늘 요리 담당은 관린이었다. 졸업 작품에 들어가면서 관린과 지훈은 굶는 걸 일상으로 했고 잘하면 관린이 지훈은 먹어야 한다며 배달앱으로 음식을 시켜 주었던 게 다였다.



“맛있어?”

 

“응, 오랜만에 먹는다. 맛있어.”

 

관린은 지훈이 먹는 걸 뚫어져라 쳐다보다 지훈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고 나서야 자신이 만든 음식에 손을 대었다. 관린은 자신보다 지훈이 늘 우선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훈이 행복하다면 자신은 그걸로 되었다.

식사가 끝나자 관린은 커피를 타주겠다며 믹스커피를 꺼냈다. 우리 집에 믹스커피가 있었지, 참. 지훈은 빛이 바랜 기억을 꺼내며 관린의 다정한 등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지금 관린에게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는 걸 얘기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하는 게 가장 좋겠지. 지훈이 생각해도 타이밍은 지금뿐이었다. 후우- 지훈은 심호흡하고 커피를 다 탄 관린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는 걸 바라보았다. 관린은 밥 잘 먹고 왜 이렇게 죽상이야. 하며 활짝 웃고 지훈에게 커피를 내어 주었다. 지훈은 마음을 먹고 말했다. 관린아, 나 할 말이 있어. 중요한 거야.

 

“도대체 뭔데 그렇게 얼굴을 굳혀. 어제 일 때문이야?”

 

아마도. 지훈은 애매하게 웃었다. 어제 술에 취해 뱉어낸 관린의 진심을 몰랐다면 이 얘기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아, 나는...”

미래에서 왔어.

 

처음 지훈의 말을 들은 관린은 믿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며 푸핫! 하고 웃었지만 장난끼도 없이 식어버린 표정의 지훈을 보고 웃음을 지웠다. 아주 먼 미래는 아니야. 네가 죽기 전인 이주 전으로 돌아왔어, 나는. 관린은 지훈의 말에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무슨 소리야.

 

"지훈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죽는다니."

 

지훈은 또다시 애매하게 웃었다. 이걸 당사자한테 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지훈은 미래의 이야기를 관린에게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까.  자신은 미래에서 왔고 라이관린 넌 교통사고로 얼마 안 가 죽게 된다고. 이 얘기를 하며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이상했을까. 지훈은 관린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나도 과거로 오게 될 줄은 몰랐어. 믿기 싫어서 널 내쳤던 것도 있지만 나는 그 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널 모르는 척하게 되더라. 미안해.



"지훈아, 믿을게."



"..."



근데



"그날이 언제인지 알려 줄 생각은 없는 거지?"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린은 미약하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무리 미래의 지훈이라도 박지훈은 박지훈이네. 변한 게 없는 건 참 좋다.  관린은 그 말을 끝으로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몸을 일으켰다. 커피가 다 식어버렸네. 다시 타 올게. 지훈은 등을 돌려 다시 커피를 타는 관린의 모습에서 고민이 많은 것이 보였다. 아마 생각이 많겠지. 믿기도 어려울 테고. 지훈은 괜히 말했나 싶었다.



"지훈아."



응? 지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관린을 쳐다보았다. 관린은 미약하게 웃고 있었다. 지훈은 관린을 보고 왜 웃는 거지? 생각이 들었다. 웃을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관린은 그런 지훈을 아는 건지 모르는 것인지 보조개를 깊게 만들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그래도 네가 죽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심장이 내려앉았다. 고민하던 순간에서도 넌 어떻게 내 생각뿐이니. 지훈이 관린의 말에 고개를 숙이자 관린은 지훈에게 다가와 지훈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지훈아. 괜찮아. 괜찮아... 지훈의 시야에서 자신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관린은 표정을 굳혔다.



관린과의 사이가 다시 좋아지자 관린은 지훈에게 다시 학교에 나가자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미래에서 다 다녀서 흥미는 없겠지만, 내가 있잖아. 어때? 구미가 좀 당겨? 라며 활짝 웃는 관린을 보고 지훈은 생각할 수 없었다. 저렇게 원해 보이는데 어떡하냐. 내가 해 줘야지.



“힉교 그 정도는 너 없이도 갈 수 있어. 저번에도 혼자 갔거든?”

 

“에이, 박지훈. 좋으면서 또 저래.”

 

지훈이 툴툴거리며 긍정의 표시를 보이자 보조개를 보이며 관린이 다시 웃었다.

 

다시 돌아온 이주라는 시간은 똑같이 금방 지나가 버리기 마련이었다. 지훈은 과거의 관린과 눈 깜짝할 새에 많은 일을 다시 해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관린이 죽고 도망치듯 울면서 뛰쳐나온 학교도 관린과 함께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 건물에서 나오면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라이관린이 보였고 또 다른 하루에는 점심시간에 맞추어 미대 건물까지 와 점심 먹자고 활짝 웃는 라이관린이 있었다. 공강 날과 주말엔 이미 함께 봤던 영화를 보러 나가기도 했다. 관린은 미리 팝콘과 콜라를 잔뜩 사 들고 기분 좋은 미소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다시 한번 관린과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감에 젖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였다. 낮에 느꼈던 행복은 잠드는 순간마다 산산이 부서졌다. 과거로 당장 돌아왔을 때의 개운하게 깼던 것들은 꿈인 것처럼 관린이 사고당하기 직전의 모습이 다시 지훈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중형차가 관린을 덮치기 직전의 그 모습. 전에는 차 색깔이나 주변의 환경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갈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꿈에 지훈은 다시 새벽마다 무릎을 끌어안고 떨어야만 했다.

이제 시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꿈을 뒤로 하고 전공 수업을 듣고 건물 밑으로 내려가자 관린이 보였다. 지훈은 활짝 웃으며 벤치에 앉아있는 관린에게 다가섰고 관린은 그런 지훈을 반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늘은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서 함께 술이나 마시자는 관린의 말에 자신의 집에서 술을 먹기로 했고 편의점에 들러 술을 샀다. 원래 둘이서는 술을 잘 먹지 않는 편인데 관린이 술을 먹자고 하다니. 지훈은 조금은 찝찝한 감이 있었지만 같이 먹고 싶을 수도 있지. 하며 저번처럼 술에 취해 울지 말라고 술을 사 들고 편의점에서 나온 관린에게 장난을 쳤다가 머리통을 꽉 깨무는 관린에 지훈은 으앙 하고 울상을 지었다. 진짜 머리통만 노리는 강아지도 아니고 아파 죽겠어. 관린은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그때 일은 잊어 줘. 했다.

 

어느정도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며 웃다보니 둘 다 알딸딸하게 취해있었다. 관린은 지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장난꾸러기처럼 웃던 모습도 지우면서 머뭇머뭇 지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훈은 그것을 눈치채고 웃었다.

 

“뭘 그렇게 입술을 달싹거려.”

 

“지훈아, 나 진지하게 물어볼 게 있는데 들어 줄래?”

 

그때 느꼈다. 둘이서는 함께 잘 마시지 않는 술을 왜 먹자고 했는지. 분명 네가 모르는 미래에 관해 묻겠지. 전부터 조금씩 느끼기는 했다. 관린이 조금씩 차를 조심하고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훈은 모르는 척했다. 관린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다고 미래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일단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에 그 얘기에 대해 내게 묻는다면 난 알려 주지 않을 거야."



"왜?"



도대체 왜? 관린은 인상을 찡그렸다.



"알려 주면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알아. 과거가 틀어지면 내가 살던 미래는?"



"그 미래를 바꾸자는 거잖아."



"뭐?"



"너는 내가 죽는 꼴을 다시 보고 싶어서 안 알려 주는 거야?"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귀에 찢어질 듯이 들렸다. 지훈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관린은 자신이 말하고서도 표정을 굳혔다. 말이 헛나갔다. 지훈의 유했던 표정이 순간 사납게 변했다.  더이상 할 말이 없다. 나가. 관린은 당황해 입을 떼려고 했지만 지훈이 이를 악물고 관린의 어깨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넌 그냥 날 그냥 박지훈으로 봐줄 수는 없었던 거야? 나보다 미래가 먼저였어?



"너한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지훈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시선을 두었고 발에서는 부서진 유리가 박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관린은 놀라 지훈의 발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지훈은 뒷걸음질만 했다. 오지 마. 그냥 나가. 이건 내가 알아서 해. 지훈은 그대로 뒷걸음질 치던 몸을 돌려 방에 들어갔다. 관린은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장 사고 나기 하루 전날에 관린과 싸우다니 지훈은 술과 어제의 다툼으로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후회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관린을 내보냈지만 관린이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도 답답했을 테니까. 말이 헛나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머뭇거리며 물어보던 관린에게 당장 내일이라고 말했어야 했는가. 생각해 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정말로 미래가 바뀌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더이상 못 만나게 된다면 다음 생에서도 살 필요가 없을 테니까. 지훈은 당장 지금 현재보다 그다음의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관린은 당장을 생각했기 때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서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카톡을 확인했을 때도 관린에게 장문의 사과가 와 있었다. 답은 보내지 못했다. 늦게 일어나 당장 학교로 출발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졸업 작품을 다 끝내지 못한 부분도 있고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라이관린은 분명 얼굴 보고 다시 사과하러 미대 건물로 올 테니까. 지훈은 급하게 집에서 빠져나와 학교로 가기 위해 계단을 빨리 내려갔다. 이미 약속 시간보다 더 늦어버린 시간과 쏟아져 내리는 비로 인해 지훈은 택시를 잡아 학교로 가달라고 했다. 택시 기사는 부드럽게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고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다시 느껴야만 하는 고통은 아마 신의 장난이겠지.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도 신의 장난 때문이야. 지훈은 창문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게 신이 준 마지막 기회라면? 하지만 택시는이미  학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지훈은 그 생각이 들자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기사 아저씨, 차 돌려주세요. 지훈은 꿈에서 보았던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이게 신이 준 마지막 기회라면 나 또한 멍청이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장소는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지훈은 택시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마 곧 있으면 관린이 이곳을 지나가겠지.



지훈의 생각대로 관린은 어깨가 축 처진 상태로 지훈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어제의 다툼 때문에 미안함이 가득해서 지금까지 쳐진 상태로 있는 거겠지. 잘못한 게 아닌데 저렇게 풀 죽어있는 것을 보니 지훈은 마음이 아팠다. 지훈은 휴대폰을 들어 관린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관린은 진동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휴대폰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지훈아. 지훈은 관린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관린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다시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던 것이었다.



이제 나에게 더이상의 후회는 없어.



지훈은 휴대폰을 꾹 잡고 골목에서 나와 관린에게로 뛰어들었다. 저기 앞에 보이는 저 하얀 중형차가 관린을 덮치기 전에. 관린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지훈을 보고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관린은 지훈에게 세게 밀쳐져 멀리 나뒹굴었고 그 순간 하얀 차가 지훈을 덮쳤다.



"지훈아!!!!"



관린은 자신이 보고 있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지훈의 이름만을 계속해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날아간 지훈에게 관린은 다가가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지 않았다. 관린은 풀린 다리를 주먹으로 때리며 지훈에게 기어가자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지훈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피를 울컥울컥 뱉어내며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관린은 짐승처럼 끄윽끄윽 울기 시작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 아아... 아 지훈아"



관린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사고로 인해 주변에 몰려있는 사람들에게 119를 불러달라고 소리쳤다. 지훈아. 지훈아. 눈 뜨고 정신 좀 차려 봐. 관린은 지훈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이거 아니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였잖아. 네가 말한 미래는 이게 아니었잖아. 말하는 관린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지훈은 그런 관린의 눈물을 훔쳐 주고 싶었지만 팔이 부러진 탓인지 팔에 힘을 줄 수 없었다. 그래도 웃을 수는 있겠지.



"관, 린아, 그만... 울어. 왜... 울고 그, 래"



"말하지 마, 제발. 지훈아. 제발"



지훈은 안간힘을 쓰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차피 난 미래에서 왔잖아. 관린은 눈물을 떨구며 지훈의 입에서 나오는 피를 계속해서 닦아내며 느리게 꿈뻑이는 눈두덩이를 쓸었다. 아니야, 지훈아. 어제 네 말이 다 맞았어. 너는 그냥 너잖아. 나 두고 가지 마, 제발. 지훈은 점점 그런 관린의 모습이 흐리게 보였다. 지훈은 시간이 더럽게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관린이에게 해 줄 말이 많은데. 피가 자꾸만 울컥울컥 올라와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아마 이 말이 마지막이 되겠지.



"관, 린... 아."



관린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눈이 흐려지는 탓에 잘 보이지 않는 관린을 보고 눈을 휘어 웃었다. 관린아.



"우리, 다음 생에서도, 꼭... 보자"



사랑해.



말이 끝난 순간 관린이 잡고 있던 지훈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관린은 믿을 수 없어 지훈의 볼을 살살 쳤지만 지훈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발... 제발 꿈이라고 해 줘. 박지훈 , 제발. 장난이잖아, 이거. 응? 박지훈!!!! 관린이 지훈을 붙잡고 외친 소리는 닿지 않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





"헉!!"



지훈은 피범벅인 상태로 숨을 헐떡이며 일어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대신 부딪혀 피를 울컥울컥 뱉던 자신과 울고 있는 관린. 하지만 지금의 지훈은 멀쩡하게 숨을 쉬고 몸도 아프지 않았다. 지훈은 이상함에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집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부 암흑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당황해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피다 무작정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훈이 계속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걷자 조금씩 빛이 보였고 그것이 암흑의 끝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훈은 걸음을 빨리해 빛으로 다가갔다. 빛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낯이 익은 인영이 보였다. 지훈은 인영을 보고 결국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빛 앞에 서 있는 인영은 그런 지훈을 보고 웃었다.



꼭 보자는 말 지켰네, 우리.

 

-

 

졸업 작품 전시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졸업 작품을 완성한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졸업 작품 앞에 서 자신의 모습을 찍기 바빴다. 학교의 학생들은 모든 졸업 작품들을 구경하며 각자 떠들고 있었다. 그중 두 명의 학생은 가장 안에 있는 졸업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서자 두 개의 작품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그림이었고 하나는 작사가 된 종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미정이었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작곡 중인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옆의 악보는 Wing이라는 제목의 곡이 보였고 사람들은 그 두 개의 작품을 보고 의아해하며 지나갔다.

 

“저 두 개만 뭔가 서로 붙어있는 것 같지 않아? 뭔가 연관이 있는 건가?”

 

“그것도 그런데 왜 저 두 작품에만 꽃이 붙어있지? 그것도 하얀색으로.”

 

구경하던 사람들은 궁금증에 생각을 입 밖으로 뱉었고 지나가던 학생이 멈춰서 그 사람들에게 말을 해 주었다.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둘은 함께하기 위해 멀리 떠나가 버렸어요.



다음 생에는 저 친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네요.

 

시끌벅적한 전시장 안에 있던 티비에서는 누군가로 인해 채널이 바뀌었는지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뉴스 속 앵커는 정자세로 속보를 읽고 있었다

“요즘 청년 자살이 많아지고 있는 가운데··· 어제 9시경 한 대학생 박모씨가 집 안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이 되어···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추정이 되고 있으며··· 유서는 없는 것으로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