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1 .
지훈이 눈을 떴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찾아 팔을 휘저었다. 팔에서 만든 파동이 생각보다 매우 컸다. 발끝까지 퍼진 통증에 다시 눈을 감았다. 배꼽 아래로 1cm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배경은 익숙한 지훈의 자취방인데 어쩐지 싸할 정도로 깨끗한 사면에 기시감을 느꼈다.
아읏, 천천히...!
뭘 천천....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머리를 땡-하고 치고 가자 반사신경처럼 벌떡 일어났다. 곧바로 딸려오는 허리 통증은 덤이었다. 이불 아래 얇은 면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시원했다. 허벅지 중심으로 퍼진 울긋불긋한 자국들은 모기라 둘러대기 미안할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지훈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건 꿈이야.
누가 그와 잤을까?
w. 익명
2 .
어쩐지 요즘 잠잠하다 했다. 한동안 안 튀어나와서 잠깐 정상인으로 느껴질 만큼 행복한 하루하루였다. 이렇게 대형사고를 칠 줄이야. 지훈이 머리를 잡아 뜯었다.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지훈은 곧바로 자신의 얼굴을 반은 가린 안경을 고쳐 썼다.
학과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3년 동안 나름 잘 지냈다. 아마 마지막이 몇달 전? 윙깅이었을 거다. -여기서 윙깅은 강아지나 뭐 거북이, 애완 토끼 같은 게 아니라 지훈을 가르켰다- 분홍색 다이어리에다 자신을 윙깅으로 정의했으며,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소심하고 조용한 지훈의 제2인격이었다. 윙깅은 유흥을 좋아하고, 유혹도 좋아했다. 바람기가 많았다. 윙깅은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전적이 있어 지훈이 지목하는 제1순위 용의자였다.
순위를 매긴다는 건 윙깅이 말고도 다른 인격이 있다는 것을 뜻했는데, 제3의 인격인 거훈이다. 거훈은 거칠고 화가 많으며 남자답지 못한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게 습관이었고 고운 미간을 있는 힘껏 찡그린 표정이 제일 멋있다고 생각한다. 지훈의 핸드폰에 한껏 찡그린 표정의 셀카가 가득했다. 나올때마다 담배를 사재기하고 보지도 못할 액션 영화표를 예매 해놓는 것이 취미다. 용의자에서 거훈을 빼먹을 순 없는 건 그날 방에 곧게 접혀있던 옷의 단추가 다 떨어져 있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옷을 아끼는 윙깅이 그럴 리 없고, 다혈질인 그는 충분히...
지훈은 한 장면만 기억하는 자신도 세 번째 용의자로 넣었다. 왜냐면 그 찰나의 기억 속에 살덩이를 짝사랑 중이었다. 그와 같은 학과이며, 2년 후배였고, 모든 게 완벽한 남자였다. 그와 말 한번 섞어보기 전에 혀부터 섞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지훈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용의자에 넣은 건 80% 희망이었고, 사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그와 눈도 못 마주친다.
[ 내 꺼♥ ]
지훈은 내 꺼♥ 라고 저장된 번호로 전화 오는 것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며 핸드폰 전원을 껐다. 마음속 윙깅이가 소리쳤다. 누구든 뭐가 문제야? 남들이 보기엔 나도 너고. 너도 나야. 너 걔 좋아한다며. 그 애 아냐? 지훈이 대답했다. 설마... 그리고 넌 내가 아니 ... 잠자코 듣고 있던 거훈이가 화를 냈다. 이 남자답지 못한 새끼야. 나가 죽어.
3 .
지훈은 3일 내내 내 꺼를 피해 다녔다. 하루는 공강이었고, 어제는 자체 공강. 오늘은 자연과학의 미래 하나였다. 과학이 이렇게 발전했는데 내 정신병 하나 못고쳐? 지훈은 마음이 심란했다. 전화는 몇 번 더 오더니 끊겼다. 그와 함께 짝사랑도 끊긴 거겠지. 누군가 비웃을지 몰라도 지훈에게는 첫사랑이었다.
지훈 선배. 얘기 좀 해요.
서둘러서 학교를 빠져나가던 발걸음이 끊겼다.
함께 지훈의 정신도 끊겼다.
4.
오늘은 누구에요?
앞서 가던 관린이 멈춘 건 한적 드문 별관 뒤 벤치였다. 관린은 지훈의 눈을 빤히 봤다. 무언가 분석을 하는 듯이. 거훈은 관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이름을 물어볼 땐 먼저 밝히고 시작하는 거란다. 싸가지없는 후배놈아. 거훈이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 새끼는 덥지도 않나. 거훈은 얼굴을 덮고 있는 안경을 벗어 던지고 끝까지 잠그고 있던 남방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야, 담배 있냐.
거훈이 벤치에 털썩 앉았다. 관린은 뒷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 보였다. 비닐까지 손 수 뜯어 바쳤다. 그래서 뭐. 라이관린입니다. 아니 시발 관등성명 할라고 나 잡았냐? 거훈은 관린을 올려다봤다.
아니요. 그, 저랑 영화 보실래요.
1-2.
지훈이 술을 마시는 곳은 항상 자취방이었다. 문을 잠그고 위험해 보이는 물건들을 모두 숨기면 준비가 완료된다. 안주로 시킨 치킨과 맥주를 홀짝 마시니 사놓은 양을 다 마셔버렸다. 평생토록 술을 마신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나 오늘따라 술이 술술 들어갔다. 기분은 술술 풀리지 않았으니 더 먹어야겠서. 지훈은 지갑을 챙겨 나섰다.
내에가 이렇게 살고 시퍼서 그러냐고요..
집 앞 편의점에 자리를 잡고 술친구로 박 부장이 같이 마셨다. 유일한 술 친구였다. 왼 쪽 손은 지훈이가, 오른쪽 손은 박 부장이. 두 캔이 짠-하고 부딪힌다. 사이좋게 한 모금씩 번갈아 마셨다.
각박한 세상에 공존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뭘 그렇게.
이게 무슨 공존이야.. 기생이자나요...
어허. 요즘 애들은 자기밖에 모른다니까. 나 때는 말이야.
아 네, 네. 자- 짠!
지훈이 박 부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한번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걸 저번에 알았다. 크흐, 3차 가세! 지훈은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기분 좋아서 먹는 거 아니거든요..좀 들어가시라구!
1-3.
지훈은 이제까지 3년 내내 학과 행사, 뒤풀이, 개강총회는 문턱도 못 밟았다. 이런 상태로 대학에 온 것만 해도 기적임과 동시에 남들에게 이기적이라 생각하며 최대한 수업만 들었다. 피해를 주니까.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개를 팍- 숙이고 다녀 지훈의 얼굴을 본 동기는 아마 없었다. 다가오는 이도 없었다.
상태가 좀 나아졌다고 오만해서 학과 전체가 모이는 술자리에 스윽 갔다가 스윽 오려고 했다. 술자리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교수님이 온다니까... 사실은 다 핑계고 짝사랑하는 그 애가 나올까 봐서 가고 싶었다.
우리 학과야? 처음 보는데.
나도 몰라.
미친놈아. 자리 없어.
아니 쟤가 간다고 할 줄 알았냐고.
안된다고 했어야지 병신아.
지훈은 조용히 핸드폰을 덮었다. 머릿속에서 펼쳐진 대화가 지훈을 겁먹게 했다. 그 날따라 이상하게 더 서글펐다. 그래서 지훈은 술을 깠다.
1-4.
지훈인, 한 개인데.. 지후니는 여러 개...
애교가 많을 때는 윙깅이. 욕이 많을 때는 거훈이...
부끄럼이 많을 때는 지후니....
어떤 게 진짜 인지 몰라 몰라...
열심히 열창하고 나니 지훈의 앞으로 캔 하나가 더 생겼다. 하아... 손이 세 개는 아니라니까 애들아. 한 명 들어가... 그 시점 지훈의 시야 전봇대들이 와리가리 치기 시작했다. 어? 뭐야. 내가 조와하는 관린이다. 이야. 진짜 같네.
여기 왜 있어?
지나가다가 보여서 왔어요.
제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는 지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관린은 지훈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지훈은 보드라운 살결에 정신을 못차렸다. 이렇게까지 취할 생각은 없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도 관린이었다. 이때 아니면 언제 관린의 눈을 마주칠까 싶어 눈에 가득 담았다. 행복했다. 근데 너 나 알어?
네.
지훈 선배.
선배가 저번에 저한테 먼저 키스하셨거든요.
근데 저 왜 버려진 거예요? 키스 다시 해요. 잘할게요.
1-5.
관린이 지훈을 처음 만난 건 대학교 입학한 주의 수요일이었다. 관린은 호기심이 많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였다. 그래서 관린이 선택한 4개의 전공 중 하나는 3학년 심화 전공이었다. 그 수업에서 지훈을 처음 봤다. 강의실 맨 앞 오른쪽 구석탱이에 앉아서 혼자 열심히 필기했다. 뭐가 중요한 건가 들어봐도 시간을 때우는 교수의 말밖에 안 들렸다. 그래서 지훈을 관심 있게 관찰했다. 관린의 자리는 지훈의 뒷줄 대각선이었다.
일학년이 있네요?
모두가 관린을 쳐다봤다. 안경을 벗고 안경알을 닦던 지훈도 뒤를 돌았다. 지훈과 눈이 마주친 관린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서로 고개를 돌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수업에서 퇴출당했다. 강제는 아니었지만, 안 나가면 큰일이 날 것처럼 이야기해서 결국 수강을 정정했다. 관린은 지훈을 어디선가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왜냐면 같은 학과니까. 물론 학년이 달랐지만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학과 생활에 참여했다.
편입이나 휴학을 했나 생각이 들었다. 캠퍼스에서 정말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번호라도 알아낼걸. 관린이 뒤늦은 후회를 했다. 관린은 술자리에서 넌지시 물어봤다. 눈이 예쁘신 선배 이름 5명. 술 게임이었다.
박효빈
김채원
김민지..? 아 씨, 생각 안 나.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동구 밖 과수원-샷.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하, 이름이 박지훈이었는데.
.
눈이 예쁜 그 선배를 상상치도 못한 의외의 곳에서 다시 만났다. 한국의 밤 문화를 알려준다며 데려온 곳이었는데 안 왔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다. 처음 와 본 클럽은 시끄럽고 지루했다. 시끄러운 음악은 좋아하나 쿵쾅거리기만 하는 음악은 취향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관린은 자신의 주위로 밀집도가 너무 높아 나가려 했다.
안녕, 일학년.
지훈이 관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눈을 가리던 앞머리가 예쁘게 말려있었다. 어떻게 목소리도 예쁘네.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지 상상은 많이 했는데 막상 앞에 나타나니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지훈은 관린의 손목을 잡고 인파를 헤쳐나갔다. 끌려간 후에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지훈은 인적이 드문 곳에 가자마자 박력 있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관린이 놀라기도 전에 뒷목을 끌어내려 입을 맞춰왔다. 너무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본능인지어라. 고개가 꺾이고 목이 감싸졌으며, 지훈의 혀가 관린의 입안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눈을 뜨면 그 선배의 속눈썹이, 눈을 감으면 차마 말로 못할 모습이 상상되었다. 선배. 죄송한데 무릎으로 자꾸 누르시면..
귀엽네. 처음이야?
이거 잘 지키구 있어. 다음에 꼭 보자
고간을 툭툭 치며 윙크를 날리고 간 그날 이후로 다시 만난 지훈은 관린을 눈도 안 마주치고 도망갔다. 지훈이 지나간 뒤로 쌩- 이라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키스가 별로였나. 관린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확히 한 번 더 보고 나니 지훈이 곳곳에서 너무 잘 보였다. 하지만 저를 피하는 것도 너무 잘 보였다. 관린은 그렇게까지 피해 다니는 지훈을 존중하기로 했다. 저를 무시하는 지훈을 잊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전혀 잊히지 않았다. 부질없는 학과 생활. 소득 없는 술자리에서 몰래 빠져나와 걸었다. ... 정말 귀신같이 찾아내네. 관린은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양손에 맥주캔을 들고 마시는 지훈을 발견했다. 그날 지훈에게 말을 건 건 불가항력이었지만, 키스 언급한 건 감성을 따른 확김에였다.
1-6.
그거 윙깅이야. 윙깅이. 나 아냐. 기억없써.
진짜 나 아니야.. 그니까 그게,
지훈은 관린을 앉혀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수년간 어디에다 말하지 못한 쌓인 이야기들이 한 가득이었다. 윙깅이는 화장도 잘해. 향수는 라벤더 향이면 다 좋아하구. 또, 거훈이는 담배랑 액션 영화 좋아하고... 저번에 누구야. 그.. 청취자의 반응이 좋아서 더욱 신났다. 관린이 보였다가, 없어졌다가. 이야기가 끊기면 사라질까 부지런히 풀어냈다.
병원을 간다? 일어나면 집이야. 또 가. 또 집이야.. 이러다가 내가 영영 못 돌아오면 어떡하지. 누가 날 기억해줄까...,미안, 너무 정신병자 같고 막 그르지.
지훈이 습관적으로 웃었다. 일을 털어놓은 건 생각보다 별일이 아니었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고, 시간이 거꾸로 가지도 않았으며, 다른 인격이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자신을 안아주고 있는 관린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꿈이라 생각했다.
저 기억력 되게 좋거든요. 제가, 형을 기억할게요.
5.
지훈이 눈을 떴다. 반 쯤 눈을 뜬 상태로 내 꺼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지금 기억나는 기억들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면.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훈선배 어디에요? 제가 지금 갈게요.
1-7.
선배는 뭘 좋아해요?
나?
네. 다른 사람 말고.
나는.. 너..?
와, 진짜. 술 안 먹었을 땐 저를 그렇게 투명인간 취급 했으면서..
그래서 싫어?
아뇨. 지금 이름 뭐라고요?
지훈.. 박지훈. 기억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