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맙소사(@myonlyo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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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해프닝으로부터 시작한다. 서로의 오해로 빚어진 아주 작은 해프닝.
"선배."
"오냐."
지훈은 더위에 지쳐 관린이 내민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물었다. 으 시원하다. 녹아내리는 표정을 짓는 지훈을 보며 관린은 웃었다. 그렇게 더워요? 느릿하게 끄덕인 지훈은 아예 관린이 들고 있던 컵을 가져와 들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빨대를 빨아대며 걷는데 지훈의 귀에 카메라 셔터음이 들려왔다. 관린이었다.
"과제?"
"과제여서가 아니라 찍고 싶어서 찍는 거예요."
"난 또 다른 과제 시작한 줄 알았네."
관린은 사진영상학과였다. 그래서 그런지 관린의 목엔 항상 DSLR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무겁지도 않은가. 지훈이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쭉 빨아들이고 떨어진 순간 관린의 체향이 훅 끼쳐왔다. 지훈은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관린에 당황해서 멍하니 관린을 바라봤고, 관린은 그런 지훈이 코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겼다.
"안경 쓴 것도 예쁜데,"
"......"
"벗는 편이 낫다니까."
여전히 벙쪄있는 지훈을 아랑곳 않고 안경을 잘 접어 든 관린은 그대로 그런 지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내 지훈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자리를 피하자 관린도 지훈을 따라간 탓에 그곳엔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지훈이 그 순간 관린을 보며 느꼈던 감정만은 그곳에 남아있었다.
*
지훈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이내 들것에 들려 실려나가는 한 신입생이 지훈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게 뭐라고 이 미친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지훈은 대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모조리 받아내다 잠시 쉬었다 가자는 심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탠드를 향해 걸어가 퍼질러 누웠다. 아, 덥다. 이 쓸데없는 경기를 처음 시작한 장본인들을 만나게 된다면 한 대씩 때려주겠다 다짐하며 지훈은 눈을 감았다.
매년 5월 중간고사가 끝나면 체육교육과와 사회체육학과의 축구 시합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선배들의 내기로부터 시작된 경기인데 재미로 시작한 경기가 어느 순간부터 체육과의 연례행사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이 행사의 성격은 약간 강제적인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신입생은 필참이었고, 고학번 선배들이 지목한 사람이라면 신입생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지훈은 두 번째 케이스에 해당됐다. 지훈이 체교과에 입학한 년도의 사범대 체육대회와 체육과 축구 경기는 모두 체교과가 우승을 거머쥐었는데, 그 중심에는 지훈이 있었다. 체육 좀 한다는 놈들이 다 모인 체교과와 사체과인데 그 중에서도 못 하는 운동이 없는 지훈은 큰 경기에서부터 자잘한 족구 시합에까지 선배들의 부름이 있다면 군말없이 출석해야 했다. 4학년이 된 올해는 드디어 경기를 쉴 수 있겠다고 좋아했건만 복학한 선배들 탓에 변함없이 운동장에 와있는 자신이 불쌍하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때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느릿하게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려 뻣뻣한 목을 풀었다. 그렇게 운동장 한가운데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지훈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선배 물 드세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그 애의 옆엔 얼굴이 낯익은 과 후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훈은 눈짓으로 물었다. 친구? 네 선배님! 제 타과 친구입니다! 그렇구나. 지훈은 처음 보는 이에게서 오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물통을 받아 들어 입을 대지 않은 채로 물을 몇 모금 마시자 뇌세포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얼른 끝내고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지훈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 애에게 물통을 다시 건네고 그 옆에 있던 후배와 함께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갔다. 일 열로 서서 사체과와 마주보고 있는데 방금 전 실려나간 체교과 한 명 때문에 경기 인원이 맞지 않았다. 지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두 사람 몫을 하면 되니까. 그래서 그냥 시작하자 말하려 했는데 평소 지훈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사체과 학회장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태클을 걸어왔다.
그럼 당신네들 쪽에서 한 놈을 빼든가... 짜증 섞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지훈은 더 이상 이 시간이 길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자진해서 아무나 한 명 데려오겠다고 스탠드로 향했다. 데려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축구 좀 한다 하는 체교과 신입생들은 이미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뜨거운 햇살을 맞고 있었다. 그때 지훈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애였다.
"한 판만 같이 뛸래?"
"저 축구 잘 못 하는데."
"어 그럴 것처럼 생겼어. 서있어만 주면 돼. 좀 덥겠지만."
그 애는 알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늘에서 나왔다. 그 애와 지훈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도착하고 나서야 경기는 시작됐고, 결과는 역시 체교과의 승리였다. 그 애는 축구를 정말 더럽게 못했다.
지훈이 경기를 열심히 뛴 이유는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샤워하고 자기 위함이었다. 지훈은 지금 고기가 구워지는 불판 앞에 앉아있었다. 선배들과 후배들의 손에 이끌려 뒤풀이 자리에 오게 된 지훈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기에는 죄가 없다고 되뇌이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최강, 체교! 멋없는 건배사가 수차례 이어졌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아졌다. 지훈의 앞에도 어느새 소주병과 맥주병이 숲의 나무처럼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훈은 맞은편에 앉아있던 선배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음과 동시에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빠져나왔다. 해방이다. 술집 문을 열자 느껴지는 시원한 밤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지훈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박지훈 선배, 맞죠."
"아 깜짝이야 전봇대인 줄."
술집 문 앞엔 그 애가 벽에 기댄 채 서있었다. 그것도 잔뜩 취한 채로. 지훈은 뭔가 불안한 낌새를 느껴 대충 그 애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저 선배 좋아해요."
"어 그래 잘 들어가고, 뭐?"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이게 무슨 소린가. 지훈은 멍하니 그 애를 바라봤다. 아니, 나는 널 처음보고 너도 날 처음 봤을 텐데 나를 좋아한다고?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그 애는 멍하니 서있는 지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지훈의 어깨 위로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야 이거 뭐, 치..."
"......"
"씨발."
예쁜 얼굴로 웃어대던 그 애의 입에서 얼굴과 정 반대의 것이 지훈의 옷 위로 쏟아졌다. 아, 오늘 왠지 재수가 존나 없더라니.
그래서 지훈은 그 애를 데리고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가장 가까운 모텔 방을 잡았다. 침대 위로 그 애를 아무렇게나 던지려다 그 애의 상의에 잔뜩 묻은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 의자 위로 그 애를 앉혀놓고 상의를 벗겨냈다. 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들을리 없는 그 애를 향해 으름장을 놓은 지훈은 욕실로 들어가 그 애의 상의와 자신의 상하의를 빨았다. 물 묻은 김에 샤워까지 한 지훈이 가운을 걸친 채 욕실을 나오자 그 애는 지훈의 말을 못 들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라도 있었는지 의자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바닥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 지훈은 이마를 짚은 채 그 커다란 자태를 바라보다 이내 그 애를 들어 침대 위로 던졌고 그 옆으로 자신의 몸 또한 던졌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지훈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하루는 지훈에게 버거웠다. 일어나면 가만 안 둬. 지훈은 그 애를 노려보다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 옷걸이에 걸어둔 옷들이 에어컨 바람 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지훈은 그 애의 고백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아침.
"선배 진짜 죄송해요. 제가 원래 이런,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
"진짜 죄송해요..., 제가 다 책임질게요."
무언가 묵직한 게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깬 지훈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그 애가 창백해진 얼굴로 제 상반신과 지훈을 번갈아가며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지훈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라 지훈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너 이름이 뭐냐?"
"진짜 죄송..., 아, 라이관린이에요."
"중국?"
"대만입니다."
"그래, 몇 살?"
"스물하나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어리구나. 그땐 그럴 수 있지. 내가 그렇게 어릴 때도 고삐 풀린 채로 퍼 마시고 실례하는 놈들이, 까지 말한 지훈은 이 말이 너무 꼰대가 할 법한 말임을 깨닫고 경악해서 입을 닫았다. 책임도 진다고 하는데 여기서 더 뭐라고 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지훈이 말을 하다 만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린이 작게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지훈은 아랑곳 않고 자기 전 걸어두었던 옷가지가 말랐는지 확인하려 걸어갔고, 관린은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진짜 책임질게요, 선배."
"그래 열심히 한 번 져 봐라, 내 계ㅈ..."
"비밀연애 쪽이 편하신가요?"
"...뭐라고?"
"아무래도 그렇겠죠? 캠퍼스니까. 첫 단추가 잘못되긴 했지만 제가 만회할 만큼 진짜 잘 해 볼게요."
지훈이 관린의 말뜻을 이해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때는 관린이 이미 지훈의 휴대폰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애인이란 이름으로 저장한 후였다.
*
지훈은 사실 관린의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했었다.
"경기 멋있었어요."
"그냥 하던 대로 한 건데 뭐. 시계 주라."
"손목 주세요. 채워줄게. 선배 그런데 그거 알아요? 저 축구는 못하는데 농구는 좀 해요."
"누가 뭐래? 아 생각해 보니까 너 축구 진짜 못 하긴 하더라."
"다음에 저 농구 경기 나가면 보러 와 주셔야 해요. 나 만회할 기회가 필요해. 약속해요, 오겠다고."
"너 그거 허세기만 해."
"허세 아니거든요? 선배 여기 물도 마셔요."
바로잡으려고 했었는데, 관린이 애인이랍시고 옆에 붙어있으니까 솔직히 편했다. 정말 편했다. 지훈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 준비하는 게 관린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라이관린과 비밀연애를 하는 채로 한 주를 보내버렸다.
"맛있어요?"
"응 너 최고다. 진짜 달라 보여."
"종종 해 줄게요. 맛있게 먹어 주니까 기분 좋네."
"파스타는 어떻게 배운 거야?
"그냥, 요리가 취미예요."
관린은 요리도 잘 했다. 그것도 지훈이 좋아하는 것마다 다 잘 했다. 어느 정도로 잘 했냐면, 관린이 자취방에 가자고 하면 지훈이 자연스럽게 오늘은 어떤 것을 먹게 될지 기대할 정도로 잘 했다.
"뭐야? 기다린 거야? 나 늦을 거라고 했잖아."
"밤에 혼자 집에 가면 쓸쓸할 것 같아서요."
"쓸쓸하긴."
5월 말미에 있는 실습을 준비하던 지훈이 늦은 시간 중도에서 나온 날이었다. 늦을 거라는 지훈의 말에 알겠다고 답한 후로 더 연락이 없던 관린이 중도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지훈은 그런 관린을 보며 반가움과 함께 이유 모를 간지러움을 느꼈다. 관린은 지훈의 걸음 속도에 맞춰서 걸었다. 선선한 바람이 지나간 자리가 시원해서 기분 좋은 밤이었다. 그래서 지훈은 관린의 오해를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아졌다. 바람이 시원해서. 지훈의 기분이 좋아져서. 이상하게 시작된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졌다. 지훈은 걸음을 멈췄다. 관린은 지훈을 따라 걸음을 멈췄다. 지훈이 말없이 관린의 눈을 응시하자, 관린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다가 작게 웃었다.
내가 필요한 걸 잘 아는 라이관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잘 만드는 라이관린. 약속이 없어도 나를 기다리는 라이관린. 이 정도면 뭐 괜찮잖아? 지훈은 아니라는 뜻으로 관린에게 고개를 저어보이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잘 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관린은 자신의 잘못으로 지훈이 자신과 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조금 구시대적인 발상이지만 그를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지훈은 마침 남자를 좋아했고, 관린 정도의 조건을 가진 사람은 이쪽에서 드물었다. 관린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술집 앞에서 관린은 지훈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훈은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관린을 속이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만의 합리화를 끝낸 지훈은 중도에서 나와 관린을 발견했던 그 순간보다는 기분이 다운 되었음을 느꼈다.
"선배 그런데,"
"어? 응."
"손 잡고 싶어요."
머릿속의 복잡하던 생각이 관린의 말로 인해 모두 지워졌다.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은 웃음이 입술 새로 새어나갔다.
"대만 애들은 손을 말하고 잡나 봐?"
"아니 아닌데, 제가 선배한테 한 실수가 있으니까."
그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단 말이야? 지훈은 입술을 말아문 채 웃다 먼저 관린의 손을 잡았다. 관린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마치 언제 다운 된 적이 있었냐고 말하는 듯한 모습으로 날갯짓을 하며. 지훈은 제 기분이 날아다니는 이유를 몰랐고,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
실습이 시작됐다. 지훈은 학교에 나가지 못하니 관린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관린은 지훈의 실습지 근처 카페에서 늘 지훈을 기다렸다. 얼음이 다 녹은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관린을 보며 지훈은 웃었다.
"과제 많아?"
지훈이 관린의 앞에 앉으며 물으면 관린은 지훈과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많은데 재밌어. 세상에 과제 재밌다는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지훈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대답하면 관린은 더 크게 웃었다. 나 같으면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갈 텐데. 관린을 여기까지 오게 만드는 힘의 근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지훈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에 대한 책임감이려나.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관린은 정말 훌륭한 애인이었다. 감히 점수를 매긴다면 백 점 만 점에 백 점. 아니 일 점 더 줘서 백일 점을 줄 만큼. 관린이 가진 책임감의 방향이 향한 것만으로 이렇게 좋은데, 순도 백 프로의 애정의 방향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지훈은 이내 생각을 갈무리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지훈은 관린을 정말 좋아한다는 사람이, 관린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기꺼이 그를 양보해 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 만나야지.
하루 실습을 끝마친 지훈이 관린을 카페에서 만나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들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입에 문 채 지훈의 자취방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평소와 같이 서로의 장소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내며 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걷다 관린이 지훈에게 뜻밖의 부탁을 했다.
"선배 실습하는 학교 구경시켜 주면 안 돼요?"
"그냥 평범한 고등학교인데? 아, 한국 고등학교가 궁금해서 그래?"
"음, 기말 과제 때문에요. 학교에서 찍을 만한 거라서."
뭐야 나 완전 헛다리 짚었네. 지훈이 말하며 웃자 관린은 지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입술을 뗐다.
"궁금한 것도 있어요. 그런데 한국 고등학교가 궁금한 게 아니야."
"그럼 뭐가 궁금한데?"
"내가 모르는 공간 속의 선배 모습."
지훈은 관린이 낯간지러운 말을 참 잘 한다고 생각했다. 양협이 붉어진 것도 모자라 귀끝까지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지훈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나 야자 감독이니까 정규 수업 끝날 때 쯤 왔다 가."
정규 수업 참관을 마치고 나온 지훈은 관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관린은 정문 앞에 와있다고 말했다. 관린의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으로 보아 관린의 주변에 학생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지훈은 알았다며 전화를 끊고 정문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관린 주변은 정규 수업만 마치고 하교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평소 관린에게서 볼 수 없는 당황한 모습이라 지훈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지훈이 가까이 다가온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관린은 자신은 외국인이고 친구를 만나러 왔다. 한국말을 잘 못한다. 등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서 지훈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내 지훈을 발견한 학생들이 소란스러워진 탓에 관린은 지훈을 발견할 수 있었고,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은 보충 수업에 참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린과 함께 학교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 탓에 교무실에만 콕 박혀있던 지훈은 학교를 구경시켜 달라는 관린의 말에 당황했지만 능숙한 척 관린의 손을 붙잡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냥 걷다가도 관린은 별안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는데 지훈은 도무지 셔터를 누르는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과제 주제가 뭐냐는 말에도 관린은 그냥 일상 사진이라며 얼버무렸다. 참을 수 없는 더위에 지훈이 관린을 끌고 들어간 체육관에선 농구부 학생들이 곧 있으면 열릴 전국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체육 교생과 훤칠한 외부인에 농구부 학생들은 물론 보충 수업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보내던 여러 학생들의 시선이 모였다.
"와 지훈 쌤 누구예요? 존나 잘생겼다."
"그치 잘생겼지."
"쌤 이 분 얼굴 빨개지시는데요?"
"헛소리 말고, 다들 연습해. 벌써 잊었어? 너희가 그랬잖아. 체전 우승하면 밥 사달라고."
"와 쌤 말돌리기. 아 누구냐니까요?"
"판타지적 인물이라고 해두자. 너희는 대학 가도 이런 사람 못 만나."
학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관린의 얼굴이 빨개졌다고 한 학생의 말이 떠올라 지훈이 관린을 돌아봤을 땐 관린의 귀끝만이 그 학생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관린과 심판석에 앉아 경기를 구경하는데 공이 관린 쪽으로 튀었다. 관린이 공을 건네주려 일어나자 학생들이 관린에게 같이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관린은 웃으며 지훈을 돌아봤고 지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안 할 거고 너는 알아서 해라. 라는 뜻이 담긴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관린은 카메라를 지훈에게 넘겨주고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지훈의 손목에 채워준 후 코트로 걸어 들어갔다. 양손에 시계를 찬 지훈은 지금 자신의 모습이 참 웃길 것 같았다.
관린은 농구를 잘 했다. 언젠가 지훈에게 했던 말처럼 정말 잘 했다. 관린이 덩크슛을 네 번 쯤 넣을 쯤에야 지훈은 정신을 차렸다. 허세인 줄 알았더니. 점수판을 넘기고 다시 경기를 바라보다 손에 있는 관린의 카메라로 눈길이 갔다. 지훈은 카메라 전원 버튼을 눌렀다. 뷰파인더에 눈을 가까이 하자 노을빛이 침범한 농구 코트 위를 뛰고 있는 관린이 보였다. 지훈은 뷰파인더를 통해 관린을 멍하니 바라보다 학교를 구경하던 관린이 하던 대로 이따금씩 사진을 찍었다. 왠지 지훈은 아까 관린이 알려주지 않았던 사진 찍는 기준을 알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관린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데 관린과 눈이 마주쳤다. 관린은 웃었다. 지훈은 관린의 웃음에 홀린 듯이 버튼을 눌렀다. 지훈은 이 사진을 관린에게 보내달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구 연습을 끝낸 관린과 밥을 함께 석식을 먹었다. 석식 먹는 내내 관린은 이제 자신의 농구 실력을 인정해 달라 주장했고 지훈은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여주며 관린의 손목을 끌어와 다시 시계를 채웠다. 지훈이 감독을 맡은 곳은 2학년 층이었다. 반마다 들어가 출석을 부르고 복도를 한 바퀴 돈 지훈은 관린이 기다리고 있는 교무실로 향했다. 관린은 지훈의 자리에 앉아 신기한 듯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
"뭐 봐?"
"음..., 선배가 아침을 시작하는 자리?"
너 사실 대만에서 온 거 다 거짓말이지. 지훈이 말하자 관린은 언제나처럼 눈꼬리를 휘어가며 웃었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 쪽으로 걸어갔다. 커피를 내려 관린에게 가져가자 관린은 고맙다며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앉아서 지훈이 실습 일지 작성하는 것을 보던 관린은 점차 고개를 꾸벅이며 졸더니 이내 지훈의 옆에 엎드린 채 잠들었다. 옆이 지나치게 조용하다 싶어 돌아본 지훈은 곤히 잠든 관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웃음지었다. 관린이 자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지훈은 생각했다. 내가 라이관린을 정말 좋아하게 된 건가? 지훈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
지훈이 오랜만에 학교에 방문했다. 교생실습을 나간다고 학과에서 공문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과제를 제출해야 출석을 인정해주겠다고 선포한 교양 교수 때문이었다. 작년의 지훈이었다면 입에 욕지거리를 단 채 과제만 제출하고 바로 귀가했겠지만 올해의 지훈은 달랐다. 올해는 학교에 관린이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학교에 방문한 거라 연락하면 분명 좋아할 거란 생각에 지훈은 관린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날따라 관린은 이상하게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야 들었어? 그 며칠 전에 대숲에 올라온 사영과 존잘, 지금 애인 없대."
"레알? 그 얼굴로?"
"그렇다니까? 방금 대숲에 누가 애인 있는지 궁금하다고 올렸는데 그 존잘 동기들이 없다고 데려가라고 존나 댓글을 달더라고."
지훈의 곁을 지나치는 학생들의 대화에 지훈은 며칠 전 관린이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군가 자신의 사진을 마음대로 찍어 대숲에 올렸는데 페이지 관리자에게 항의해서 사진을 내렸다고 관린은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까지 안 올라온 게 신기할 정도인 얼굴이었으니까.
"......"
관린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 시간은 다섯 시였고 관린이 교양 수업을 마치고 나올 시간이었다. 교양동 앞으로 가면 관린을 만날 수 있겠지만 왠지 가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지훈은 휴대폰 전원을 끄고 집으로 걸어갔다.
자고 일어나니 밤 10시였다. 씻고 나온 지훈이 휴대폰 전원을 켜자 관린이 보낸 메세지와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아까 학교에서 느낀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지훈은 불쾌했다. 자신의 관린이 다른 사람의 입에 관린이 오르내리는 게. 천천히 관린의 메세지를 읽던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반팔을 꺼내 입고 집에서 나온 지훈은 관린의 마지막 메세지에 적힌 술집을 향해 갔다.
술집에선 여러 무리의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고개를 몇 번 돌리니 이미 취한 듯한 모습의 관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훈은 곧장 그쪽으로 걸어가 관린의 앞에 앉았다. 관린과 합석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지훈에게로 모였다. 왜, 뭐. 말걸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아우라를 풍기며 지훈은 관린 앞의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어...? 선배?"
어 선배 좋아하네. 지훈은 주위를 둘러봤다. 영락없는 헌팅의 현장이었다. 지훈의 등장에 당황했던 상대 테이블의 사람들은 지훈의 얼굴을 확인하고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이 지훈을 향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지훈의 속도 모르는 관린은 지훈을 보며 헤실거리기 바빴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한 모습의 관린에 지훈은 그 옆으로 자리를 옮겨 어깨를 내어줬다. 관린을 재운 지훈은 테이블을 훑어 이 거지 같은 헌팅의 주도자인 것 같은 인물에게 술을 따라줬다. 관린이 친한 형이에요. 재밌는 거 하고 있다고 오라 해서. 술 잘 하는 것 같은데 잘 하는 사람들끼리 좋죠?
정의의 사도마냥 헌팅 주도자를 엎어뜨린 지훈은 관린을 데리고 술집을 나왔다. 처음 본 날에도 느꼈던 건데 관린은 참 전봇대마냥 컸다. 그러니까 데리고 가기 힘들단 말이다. 관린을 데리고 지훈의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 지훈은 다시 샤워를 해야만 했다. 몇 시간 전처럼 보송해진 채 욕실에서 나온 지훈은 데자뷰를 느꼈다. 그때와 다른 점을 꼽으라면 지훈이 관린을 침대 위로 곱게 던졌다는 걸 꼽을 수 있었다. 지훈은 침대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관린의 얼굴을 대놓고 훑어봤다.
지훈이 느낀 이상한 감정은 질투였다. 지훈은 관린을 좋아하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구체적인 감정으로 관린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지만, 지훈은 관린을 확실히 좋아했다. 내가 필요한 걸 잘 알아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잘 만들어서. 약속이 없어도 나를 기다려서. 내가 없으면 날 보고 싶어 해 줘서. 내 일상을 궁금해 해 줘서. 농구를 잘 해서. 취하면 귀여워서. 지훈은 관린이 좋았다. 저와 관린 사이에서 책임감을 빼면 남는 게 무엇일지 생각했을 때 그게 지훈 혼자만의 사랑이 아니길 바랄 만큼 좋았다.
그래서 입술을 포갰다. 관린의 붉은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갠 채 한참을 있었다. 지훈의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관린은 자고 있었다. 그런 관린을 향해 네가 싫다고 안 한 거야. 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중얼거린 지훈은 다시 관린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러자 지훈의 머리를 감싸는 손길이 있었다. 일어났나? 몸을 흠칫 떨며 떨어지려던 지훈을 관린은 놓아주지 않았다. 혀가 구순 새를 파고들었고 뜨끈한 혀가 만나 부벼졌다. 시간의 흐름을 모르는 사람들마냥 혀를 얽다 떨어졌을 때 관린은 나른한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제 입술을 말아문 지훈은 벌떡 일어나 방 불을 껐고 방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긴 밤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난 관린은 지훈과 키스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지훈은 해장국을 시켜 관린과 먹고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까지 꺼내 관린의 손에 쥐어줬다. 지훈이 헌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관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서있던 그때처럼. 관린이 친구 때문에 강제적으로 헌팅에 참여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지훈은 그저 이 상황이 재밌었다. 관린은 안절부절 못하며 사과하다 지훈이 진짜 괜찮다며 지훈의 입에 물었던 사과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려준 후에야 사과를 멈췄다.
지훈은 관린을 관린의 자취방 앞까지 데려다 줬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는 관린을 향해 어제 잠들지 못하고 정리한 생각들을 꺼내놓았다.
"관린아."
"네, 선배."
"우리 그때 안 잤어."
"네?"
"네가 오해한 거고, 내가 정정하지 않았어. 미안해."
"그게 무슨"
"말하려고 했는데 점점 네가 욕심 나더라."
"......"
지훈은 관린의 표정을 보고 조금은 후회했다.
"너무 욕심이 나니까 이제 너한테 선배라고 불리기도 싫어졌어."
"......"
"형이라고 불리고 싶고, 시간이 더 지나면 지훈이라고 불리고 싶어질 것 같아."
지훈은 관린의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의 관린을 바라보던 걸 멈추고 뒤돌아 냅다 뛰었다. 원래 지훈은 미안하단 말까지 하고 용서를 빌려고 했다. 너와 제대로 시작해 보고 싶단 말을 하고 싶었다. 둘 다 못한 건 지금까지의 관계에서 책임감을 빼면 지훈이 관린을 좋아하는 마음과 관린이 지훈을 좋아하는 마음이 남길 바랐는데 그게 아닌 걸 확인하니 자신이 없어진 탓이었다. 지훈은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관린과 함께 있던 제 자취방에 혼자 들어왔다. 관린이 남긴 아이스크림 막대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과 없이 용서를 기다려도 될까? 지훈은 울고 싶었다.
*
실습 마지막 날. 그날 이후로 지훈은 관린을 보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관린이 기다리던 카페에도 가봤지만 그곳에서도 관린을 볼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서프라이즈 파티를 받으면서도 지훈은 관린을 생각했다. 학생들이 쓴 롤링페이퍼와 여러 선물들을 품에 안고 자취방에 돌아와서도 관린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관린이 학교에서 저를 따라다니며 찍었던 사진들이. 사과 없이 용서를 기다리던 나날 중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지도교수님께 실습일지를 내고 나오는 지훈의 눈에 사영과 기말과제전 포스터가 들어왔다. 저기에 가면 볼 수 있으려나. 지훈은 시계를 확인했다. 4시였다. 지금 쯤이면 사람이 없을 거란 생각에 지훈은 포스터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지훈의 예상대로 건물 지하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작품들을 감상하다 익숙한 풍경을 발견하고 지훈은 걸음을 멈췄다.
[Summer cold] 201910609 라이관린
관린의 액자엔 더위에 익어 달뜬 지훈이 손부채질을 하며 노을 지는 강당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잔잔한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칼과 살짝 달아오른 지훈의 귀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훈은 그 액자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관린에게 학교를 구경시켜 주다 더위에 지쳐 체육관으로 걸어가던 순간이었다. 지훈은 홀린 듯이 그 옆 액자로 시선을 옮겼다.
[Every moment of My summer] 201910609 라이관린
그날 농구 연습이 끝난 후 체육관 앞에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지훈의 모습이었다. 아주 멀리서 찍은 사진이라 지훈과 학생들보다는 노을 파편들에 초점을 뒀다고 보는 게 좋을 사진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관린이 저를 찍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훈의 옆모습만이 어렴풋이 나온 사진이었는데 그것만 봐도 박지훈 자신이 아주 행복하게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훈이 전시장을 나와 지하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오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관린이 오고 있었다. 멍하니 걷던 지훈이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관린이 지훈을 보고 있었다.
"전시 구경 왔어요?"
"......응. 궁금해서."
관린은 그런 지훈을 바라보다 뒤돌았다. 말할 거 있어요. 지훈은 그런 관린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관린을 따라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이상하게도 건물 앞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그 때 보내달라고 했던 직접 찍은 사진들 보내는 걸 깜빡했는데 메일 주소를 몰라서요."
"......아."
"보정 작업도 다 끝났어요. 방금 봤으면 알지 않아요? 저 사진 잘 찍는 거."
"관린아."
"형."
그제서야 지훈은 고개를 들어 관린을 바라봤다. 거울을 보지 못했지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관린은 그런 지훈을 보며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웃었다. 그제서야 전시회의 제목이 지훈의 눈에 들어왔다.
[끝나지 않을 여름]
w. 오즈의 맙소사
*
저 사실 형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요. 웃기죠? 처음 본 순간부터 누굴 좋아하는 게 가능한지 저도 그때 처음 알았다니까요. 대운동장에서 형 처음 본 거 아니에요. 작년에 형이랑 같은 교양 들었는데 형은 기억 못하죠? 형이 수업에 늦게 들어왔던 날이 있었는데 그때 형이 저한테 필기 좀 보여달라고 했어요. 그때 형 보고 좋아하게 됐어요. 그때 기숙사 살았었는데 마침 형이랑 같은 과인 애가 있어서 걔한테 형에 대해 많이 물어봤어요. 대운동장도 그래서 간 거예요. 체육과 축구 경기가 있는데 형이 나온다는 거야. 그럼 내가 가야지. 그래서 그때 형이 저한테 같이 축구 뛰자고 해서 좋았어요. 이상하게 저는 축구를 못해서 잘 안 하는데 형이 하자고 해서 한 거예요. 뒤풀이도 형 보려고 따라갔어요. 술집 밖에서 형한테 고백한 건 진짜 mistake. 실수했어요. 언젠가 고백을 하게 되더라도 그렇게 멋 없게 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는데. 그것만 실수냐고요? 아 저 지금 부끄러워지려고 해요... 사실 부끄러워요. 그러니까 그건 이제 말하지 말아요. 아무튼 모텔에서 눈 떴을 때 상황 파악을 다 했어요. 아 내가 어제 형한테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 그래서 형이 여기 데려왔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거 저도 알았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얼마 전에 봤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우리 같은 상황에 무슨 일 있었는 줄 알고 만났다가 잘 됐던 게 생각이 난 거예요. 그래서 형 일어난 거 보자마자 연기했어요. 우리도 그 주인공들처럼 잘 되면 좋겠어서. 형이랑 잘 되고 싶어서.
관린의 긴 고백이 끝나고 지훈은 관린의 맨살을 찰싹 때렸다. 내가 그거 때문에 마음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어? 더 맞아, 더 맞아. 관린은 지훈에게 맞으면서도 좋다고 웃다가 지훈의 상박을 끌어안았다. 마주닿는 맨살의 감촉이 좋았다. 이거 안 놔? 응 지훈이 안 놔. 어쭈. 관린은 이 순간이 정말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훈을 안은 채 눈 감고 있던 관린이 품안에서 조용해진 지훈에 고개를 숙여 지훈을 바라보자 지훈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런 지훈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지훈의 얼굴 곳곳에 입맞춘 관린은 어젯밤처럼 다시 지훈의 위로 올랐다. 야, 야. 뭐 해? 내려와. 어?
이번 여름은 관린에게 한꺼번에 쏟아졌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쏟아진 여름 사이에서 관린은 지훈을 잡았다. 끝나지 않을 여름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