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버디

포인






지금도 문득 그때를 생각한다.


길가에 조금만 나와 있어도 온몸이 흠뻑 젖을 만큼 덥고 습했던 한 여름의 타이베이. 단수이에 갔던 일. 거기서 봤던 노을. 같이 들었던 혼네의 노래. 이제는 어렴풋하게 잔상만 남은 기억들은 가끔 호우처럼 나를 덮쳤다.


인생이란 건 원래 내가 잡을 수 있는 것보다 놓치는 게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앞으로 더 많은 걸 놓치게 될 거고 이것만큼은 반드시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가고 없는 것들도 있을 거고 애초부터 아니었던 것도 있을 거다. 나는 내가 놓친 것들 때문에 종종 울게 될 거고 다시 오는 것들에 의해 웃게 될 거다.


그때 난 박지훈을 잡아야 했나. 아니면 이미 잡고 있었나. 중요한 건 박지훈은 이제 가고 없다는 사실이었다.





버디버디
포인 씀






교환학생 버디를 신청하게 된 계기는 별 다를 게 없었다. 최근에 산 노트북 때문에 돈이 궁했고 마침 학과 게시판에 한국인 교환학생 버디를 구한다는 공고가 올라왔고 봉사시간도 주는데 활동비까지 지원해준다는데 딱히 신청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선착순으로 받는 신청이었기 때문에 결과는 금방 나왔다. 다행히 턱걸이로 선착순 안에 들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이번 학기 용돈은 이걸로 해결할 수 있겠구나 기뻐했다.


버디가 오기 전 짧게나마 버디버디 프로그램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들었고 그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2주 뒤 공항에서 버디를 처음 만났다. 버디의 첫인상은 뭐랄까. 사나운 강아지 같았다. 얼굴만 봤을 땐 선한 느낌이었는데 눈빛은 또 그게 아니라 괜히 말도 걸기 전에 몸이 쭈뼛쭈뼛 굳었다.


일단 돈 준다는 말에 냅다 신청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낯을 가리는 인간이라는 걸 깜빡했던 게 문제였다. 같은 나라 사람과도 낯을 가리는데 타국 사람이랑 한 학기를 어떻게 보내지? 도대체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지? 돈이면 다냐? 그래, 돈이면 다지. 강의실 앞에서 한 학기 동안 우리는 이런 프로그램을 할 겁니다를 떠들고 있는 조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좆됐다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돌아와 학과 강의실에서 바로 전체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가졌고 그게 끝난 후엔 버디와 함께 캠퍼스를 둘러보며 서로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 게 오늘 버디버디 프로그램의 일정이었다. 근데 내 버디는 나와 둘이 남자마자 오늘 캠퍼스 투어했다고 치고 집으로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안 돼.


내 말을 들은 버디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안 되는 걸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인데 저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버디는 핸드폰을 와다다 두드리더니 내게 액정 화면을 슥 내밀어 보여줬다.


爲什不行?
왜 안 되는데?


왜 안 되냐면. 말을 하려다가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나는 이 만남이 끝난 후에 버디일지라는 걸 적어야 하는데 거기에 우리가 같이 활동한 사진도 올려야 한다. 그래야지 내가 돈을 받을 수 있다를 뭐 어떻게 설명하냐고.


버디는 어서 대답해보라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 적어야 돼. 일기. 그래서, 사진 필요해.


그냥 나도 번역기 돌려서 보여줄 걸 그랬나. 괜히 뻘쭘해져서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려던 찰나에 버디는 쯔따오…러?, 그렇게 대답했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타국어가 어색한지 대답을 하고서도 내 눈치를 봤다.


그날 우리는 학교 근처에 있는 우육면 가게에 가서 우육면을 먹었다. 대화는 간간이 번역기를 통해 이어졌다. 나도 아는 한국어가 별로 없었고 버디는 내가 한국어를 모르는 것보다 더 중국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영어로도 몇 번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서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둘 다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쟤영어 더럽게 못 하네.


어쩐지 오늘따라 하루가 길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버디의 이름은 박지훈. 나이는 나보다 2살이 더 많았고 오늘 알게 된 특이점은 다른 교환학생들처럼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게 아닌 자취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서로 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버디는 짧게 얘기했다.


그냥.


그냥… 이라는 말은 언어와 관계 없이 그냥 정말 모르겠는 말 중 하나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첫 만남으로부터 2주 뒤의 일이었다. 다른 버디들은 첫 만남 이후 한 번 더 보거나 더한 애는 매일 만나다시피 하기도 한다던데 우리에게 그런 일은 딴 세상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무신경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리 버디의 첫인상을 나쁘게(까지는 아니지만) 봤다고 해서 그에게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나름 할 도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 지내냐, 학교 다니면서 어려운 건 없냐,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메시지를 보내도 좋다고 했는데 걘 그냥 다른 것보다 나랑 대화를 주고받는 게 더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럼 다음 모임 때보자며 대화를 끊고선 잊고 살았다. 만약 2주에 한 번 만나야 하는 강제성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다시 볼 일은 아마 없지 않았을까.


아무튼 버디와 나는 급하게 오늘 할 일정에 대해서 어젯밤 대화를 나눴고 그렇게 나온 게 ‘단수이에 가서 카스테라 먹기’였다. 내가 들은 바로 다른 팀들은 고궁박물관에 가거나 시립미술관에 가거나 아무튼 뭐 좀 그럴싸해 보이는 걸 한다고 했는데우리는 단수이에 가서 카스테라 먹기라니. 아무리 아무거나 해도 된다곤 했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조교님이 보고 이런 건 활동으로 쳐줄 수 없다며 돈 안 주면 어떡하지.


단수이에 가서 카스테라를 먹고 싶기라는 게 사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타이페이 여행 코스가 아닌가? 내 버디는 여행이 하고 싶은 걸까?그러면 근교로 진짜 여행을 가는 게 더 좋지 않나? 하지만 나의 이런 의문은 형체를 갖지 못 하고 내 안에서 다시 사라졌다. 한국어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고 중국어로도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러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린 학교 앞에서 만나 간단하게 곱창국수를 먹고서 단수이로 향했다. 버스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비가 올 듯 흐렸다. 이왕 가는 거 날씨가 맑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버디는 꽤 신이 나는지 창 너머를 바라보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더니 끼고 있던 에어팟을 주면서 ‘뮤직 오케이?’라고 물었다. 그래, 나도 뮤직 오케이다. 나는 버디가 건네준 에어팟 한 쪽을 받아 들고 내 귀에 끼었다.


Yeah I'm beautiful, but I must explain.
My mind's not in a good place, and so the comedown plays.


에어팟에선 버디도 나도 못하는 영어 가사의 팝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듣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곡이었다. 괜히 진짜로 여행 가는 것 같아서 나도 좀 들뜨기 시작했다. 일단 홍마오청에서 진리대학까지 갔다가 내려와서 카스테라를 산 다음 전망대로 가면 되겠지? 버디가 좋아할까. 너무 전형적인 여행코슨가. 뒤늦게라도 날이 개서 전망대에서 멋진 노을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아쉬움과 혹시라는 기대가 뒤섞인 버스가 계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버디와 나는 그 이후로 또 말이 없었지만, 우리는 흘러나오는 음악과 버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흐린 풍경 만으로도 꽤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전망대에 오기까지 우리에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일단 홍마오청에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졌다는 거고 하필 또 우산은 나 밖에 없어서 남자 둘이 쓰기엔 작았지만 달리 근처에 편의점이 보이지 않아 일단은 우산 하나에 몸을 구겨 넣고 홍마오청을 걸어야만 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한 번씩 버디가 멈춰 설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의 포토타임이다. 버디는 들고 온 필름 카메라로 주변을 열심히 찍었다. 비 때문에 뭐 찍히는 게 있을까 싶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버디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괜히 저렇게 열심히 찍으니 결과물이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 대만에서 인화할 생각이라면 내가 같이 가주겠다고 말할까 하려다가 오바 떨지 말자며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진리대학으로 넘어갈 때쯤 비가 그쳤고 여전히 날씨는 흐렸지만, 그래도 비가 오지 않는 다는 것만으로도 꽤 걸을만해 져서 좋았다. 버디는 진리대학에 가서도 열심히 사진을 찍었고 아까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내 주변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움직였다. 더위는 한 풀 꺾였지만 습도는 여전해서 온몸이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었는데 버디의 머리카락은 습도 따위는 모른다는 듯 보송한 상태로 팔랑거렸다. 버디가 움직일 때마다 흑갈색 머리가 사뿐사뿐 움직였다.


그쯤 되니 슬슬 출출해지기 시작해 버디와 나는 구시가지 해변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대충 이른 저녁을 해결하고 바로 카스테라를 사러 움직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구름이 걷혀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고 조금만 더 있으면 해가 지기 시작할 것 같았다. 잘하면 전망대에서 노을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괜히 버디에게 빨리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좋아하겠지? 아마 좋아할 거야.


20분 정도의 기다림 끝에 우리는 치즈 카스테라 하나를 사서 페리를 타러 이동했다. 위런마터우 전망대까지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해를 보니까 페리 위에서 보는 풍경이 예쁠 것 같아서 버디에게 페리를 타고 가는 건 어떻겠냐고 추천했다. 버디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페리 위에서 태양 빛에 주황색으로 물든 건물을 바라보며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 도착해 우리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다리 부근에 자리를 잡고 서서 서서히 지고 있는 해를 바라봤다. 느리지만 선명하게 떨어지고 있는 해는 어느새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였고 이내 진한 분홍색이 되었다.


버디는 먹고 있던 카스테라를 바닥에 내려 놓고서 쥐고 있던 필름 카메라를 들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필름이 계속해서 쉴 새 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진을 다 찍었다고 생각했는지 버디는 필름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바닥에 놔둔 카스테라 박스를 들어 다시 카스테라를 먹었다.


나도 오랜만에 보는 멋진 풍경에 핸드폰을 들어 사진 몇 장 찍어주고 눈으로 오래 그 모습을 담았는데 그때 카스테라를 먹고 있던 버디가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뮤직, 오케이?’ 라고 물었다. 나는 버디에 손에 쥐어진 에어팟을 받아 들고선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에어팟 너머에선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풍경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꽤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문득문득 그때를 생각하곤 했다.


기억은 갑자기 찾아오는 소나기처럼 나를 흠뻑 적시고 이내 사라졌지만, 그때의 기억이 쏟아질 때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 기억을 맞아야만 했다. 어깨에 떨어지는 비가 꽤 아팠는데도 비를 막아야 겠단 생각은 하지 못 했다.


한 번씩 혼자 다시 단수이에 가서 카스테라를 하나 사 들고 전망대로 가 노을을 보기도 했는데 어쩐지 그때만큼 좋았던 기억은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노을은 예뻤고 카스테라는 맛있었는데도 그랬다.


그때 버디와 함께 들었던 음악이 다시 듣고 싶어졌지만, 나는 그 음악의 제목도 그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이름도 몰랐다. 내가 기억하는 건 버스에서 들었던 혼네의 음악 뿐이었기에 나는 단수이에서 들었던 노래 대신 혼네의 음악을 듣곤 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엔 너무 신이 나는 그래서 혼자서만 보송하게 팔랑이던 버디의 머리카락이 생각나는.


고작 한 사람이 왔다 갔을 뿐인데 아주 많은 것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