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ummer(@xummer_)
ㄴ김: 난 좀 소름돋던데... 개주인 화생공 걔라며
ㄴ이: 걔♡개냐고
ㄴ박: 미친 끼리끼리노네
ㄴ최: 둘이 어릴 때 부터 알던 사이래요 지금도 옆집 산다던데
지훈은 핸드폰으로 글을 읽다 이마를 짚었다. 뭐 이 씨발, 이런게 다.
야 이제 너도 한 물 갔다, 그치. 신입생 때는 진짜 많더니 군대 갔다 왔다고 이제 너 찾는 글 많이 줄었어. 놀리던 동기들이 무색하게 지훈은 2020년의 개강 첫 날부터 대숲을 뒤집어 놓았다. 그 날이 대만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가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박지훈의 ‘우리 관린이’가 K대에서 맞이한 개강 첫 날이었다. 경영대 건물 앞에 가만 서 있는 잘생긴 사내를 향해 뛰어가는 경영 개 목격담이 개강 첫 날의 대숲을 뒤덮었다. 어디서 숨어있다가 다 기어나온 거야, 이 자식들. 지훈은 간과하고 있었으나 아직 신입생 때 화려하게 대숲을 누비던 경영 개 박지훈을 알던 동년배들이 학교를 떠나지 못했을 시점이긴 했다. 관린아! 크게 외치며 뛰어가다 넘어질 뻔 하는 지훈을 붙들고 형, 다치면 안돼. 하는 모습은 동영상까지 찍혀 K대 대숲 레전드로 알음알음 박제되기까지 했다. 왜 여기까지 왔어, 너 공대 입학했다며. 거기 건물 여기랑 엄청 멀텐데. 내가 간다니까 왜 오구 그래. 아무리 3월이라지만 아직 추운데. 봐 봐. 쟤네 아직도 돕바 입었잖아. 안그래도 추위도 많이 타면서! 안에 있으면 형이 알아서 갔을 텐데. 지훈이 쉼없이 조잘거리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게 웃다 지훈의 이마 위로 내려온 앞머리를 넘겨주던 관린은 왕자님같은 제 얼굴과 경영 개의 유명세를 더해 대숲에 자주 등장하다, 결국 전교생에게 입학 한달만에 ‘경영 걔랑 같이 있던 남신’ 에서 ‘화생공 남신’을 거쳐 ‘경영 개 주인’이 되었다.
지훈의 주변에 늘어서서 경영관 2층 출입구 앞 너구리굴을 만드는 데 일조하던 지훈의 동기들이 낄낄거렸다. 경영 개-새끼님, 저기 주인님 오시는 것 같은데 안 가보셔도 되나요? 물고 있던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아 낸 지훈이 입을 열었다. 새끼들아, 관린이한테 나한테 입턴 거 똑같이 털었다가는 씨발 내가 니네 아구창을 털어버린다. 진심이 가득 담긴 지훈의 주먹이 흔들리는 것을 본 동기들이 물고 있던 담배를 지져끄며 구시렁댔다. 박지훈 이 새끼는, 라이관린만 엮이면 저 지랄이야. 니네가 우리 관린이랑 같냐? 거울을 좀 보세요, 거울을. 거기다 톡 쏴붙이던 싸늘한 표정은 어느새 저어기쯤 도착해서는 형! 하고 부르는 관린의 목소리와 함께 화사한 미소로 탈바꿈했다. 응, 관린아! 하고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지훈은 제 동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입을 한 번 가르키더니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한번 더 경고하건대, 입 잘못 놀리면 뒤진다는 의미였다. 알겠으니까 빨리 꺼져, 좀. 옆집 동생이라고 하지 않았냐? 누가 보면 지 새끼인줄 알겠네. 언제 봐도 소름끼쳐, 저 새끼 인성 감추는 거. 누군가 중얼거리자 나머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젓는 동기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지훈이 관린이 오던 방향을 향해 몸을 틀자마자, 툭. 금새 지훈의 옆에 와서 선 관린의 어깨에 이마를 부딪혔다.
"새끼라뇨."
어디서부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관린의 표정이 찌푸려진 채였다. 얼굴을 찌푸린 와중에도 진짜 살짝 툭, 아니면 톡. 그정도의 의태어가 어울릴 정도의 속도로 닿았던 지훈의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아파요? 하고 속삭이는 관린과 아니? 하나도 안 아파. 그런 관린을 마주보며 웃음짓는 지훈까지.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이었다. 가관이다, 씨발. 동기 하나가 중얼거렸다. 나머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씨, ...발이라뇨. 선배님들. 관린이 낮게 읊조렸고 그때까지도 관린만 보며 해사하게 웃고 있던 지훈은 관린의 입술 새로 짓씹듯이 뱉어진 씨발 두 글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우리 관린이가?
"미안해, 관린아. 형이 잘못했어. 저 새끼들이랑, 아니. 쟤네랑 절교할까? 너는 나쁜 말 하면 안 돼. 듣는 것도 안 돼. 알지?"
그리고 앞으로 쟤네가 너 보고 아는 척 해도 받아주지 마. 쟤네 내 친구 아니야. 알았지? 빠르게 말을 마친 지훈이 급히 제 손을 들어 제 동기들의 쌍소리로부터 보호하듯 관린의 두 귀를 막았고 어느새 절교당한 동기들은 방금 전까지 함께(혹은 지가 제일 많이) 쌍소리를 내뱉던 박지훈을 추억했다. 개새끼...... 의리라곤 조또 없어. 어차피 저 새끼 너 없으면 우리 존나 쌩 까, 등신아......
"형도 나쁜 말 안 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평소보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에 지훈이 우물쭈물 관린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미남의 정석같은 얼굴이 지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관린이, 언제 이렇게 컸담. 지훈은 고개를 슬며시 올려다보며 눈치를 살피다 저보다 커진 관린이 자랑스럽다는 듯 감탄에 휩싸인 눈동자를 했다. 순식간에 감탄과 애정만 가득해진 지훈의 표정을 보던 관린의 미간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풀렸다. 스르르 풀리는 관린의 미간을 바라보며 지훈은 머리를 굴렸다. 관린이는 아직 대숲 올라온 거 모르는 것 같은데, 아닌가? 그냥, 뒤에 욕하는 거만 좀 들었나봐.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실 지훈도 방금 전 저를 보며 너 관린이 걔랑 그렇고 그런 사이냐? 하며 킬킬대던 동기들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일이다. 방금 쭉 읽어보니 박지훈만 대놓고 엿먹어보라는 게 분명했다. 개 장수도 아니고 개 주인이야 특별히 나쁜 말이 아니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멀쩡한 사람한테 개라고 하는 새끼들이 문제였다. 이놈의 대나무숲. 대체 언제쯤 없어질 거야? 어떤 새끼인지 몰라도, 찾아내면 족쳐버린다. 관린이가 알기 전에 당장 지우라고 해야지. 우리 관린이, 이제 예쁘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 만나서 연애도 해야 하는데 무슨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오해를 사게 만들어. 지랄들을 하고 있네. 이게 상아탑 어쩌고 하는 대학에서 있을 일이냐? 지훈은 두 마디마다 쌍욕이 섞이는 속마음을 숨긴 채 관린을 보며 웃었고 해사하기만 한 지훈의 얼굴을 보며 관린도 마주 웃었다. 남이 보기엔 쌍으로 염병이고, 그래서 그런 오해를 받는 거였다. 야, 우리 관린이 좋은 사람 만나야 되는데 나랑 그렇고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지훈이 그렇게 윽박지르듯 말할 때마다 옆에서 듣던 관린의 눈꼬리가 살짝 구겨지며 파르르 흔들리는 것을 지훈만 몰랐다.
박지훈은 유명했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그랬다. 박지훈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지금이야 완연한 남자로 컸다지만 어릴 때는 성별이 모호할만큼 예뻤다. 인형같은 제 아이를 자랑하려 지훈의 어머니는 방송국에 매일같이 출근도장을 찍었다. 어미 눈에 안 예쁜 자식이 있겠냐만은 지훈은 낳은 어머니의 눈 뿐만 아니라 제대로 눈 달린 사람에게는 다 예뻐보였으니 데뷔는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꽤 잘 팔리는 아역배우의 삶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이사온 옆집 동생 라이관린의 형아 나랑 같이 있자 소리에 곧바로 막을 내렸다. 고집불통 박지훈이 관린이랑 있어줘야 한다며 촬영을 거부한 탓이다. 관린이가 나 없으면 안된다고 했단 말이야! 라이관린을 제 등 뒤에 숨긴 채 일곱살의 박지훈이 엄마에게 대들 때, 라이관린은 그런 박지훈의 등 뒤에서 박지훈의 엄마를 향해 슈렉에 나오는 고양이 눈빛을 발사했다. 마산 똥고집을 누가 말려, 진짜. 지훈의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둘은 어려서부터 아주 환상의 콤비였다. 관린은 어릴 때부터 지훈을 제 옆에 묶어두려 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진짜, 똑똑했지, 내가. 거기서 안 말렸어봐. 박지훈 슈퍼스타 됐을걸? 지금도 인기 많아서 짜증나는데, 여기서 연예인을 한다? 나 그럼 진짜 화병났을 걸.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자발적이지 않게 타인의 관심 속에서 흘러갔던 삶은 박지훈을 좀 무심하게 만들었다. 그게 조금이 아니고 타인의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다 못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 싸가지로 자랄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그랬다. 라이관린은 항상 이 모든 것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본인 인기있는 것도 몰라, 자기 예쁘고 귀여운 것도 몰라, 누가 자기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남이 좋아하는걸 모르는 거야 좋았지만 눈치도 드럽게 없는 박지훈은 라이관린이 본인 인생 스무해 중 열다섯해를 박지훈을 좋아해왔다는 것도 몰랐다. 눈치 진짜 하나도 없어, 귀엽게. 짜증나, 진짜. 제 주변에서야 성격 가지고 하도 지랄들을 하시다보니 박지훈은 저 욕하는데는 그러려니 했다. 물론 박지훈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제3자가 보기에는 지랄도 저런 지랄이 또 없었다. 그래도 지훈은 자신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눈 앞에서만 안 하면 뭐라고 안 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이런 지훈이 한 수, 아니 오천만번이고 접어주는 상대는 다섯 손가락에 꼽혔는데, 개중 하나가 라이관린이었다. 물론 나머지 네 손가락은 각각 제 부모와 관린의 부모님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 부모님께는 좀 덜 접어드리긴 했다. 아이, 엄마. 지후니 함만 봐조. 손을 모으며 윙크하는 장면 하나로 전국 텐텐 판매량의 신기록을 세운 아역모델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이렇게 유용했다. 부모님이 아니어도 제 외모의 장점을 명확히 알고 있는 왕년의 아역배우는 시기 적절하게 제 무기를 휘둘렀고 그래서 박지훈은 통상 성격에 비해 욕은 덜 먹고 살았다. 제 이름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씹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독야청청 마이웨이를 고집하며 가끔은 욕을 사서도 먹던 박지훈이지만, 라이관린이 엮여있다면 말이 달랐다. 라이관린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이유는 귀여워서였다. 그래도 욕은 진짜 좀 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한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박지훈이 욕하는 걸 주구장창 듣다보니 별 거 아닌 욕만 들어도 설 것 같아서다. 그건 시―ㅂ, 좀 변태같잖아. 또 하나는 그 놈의 그, 애교. 그거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거 보는 모든 사람이 전부 반할 것 같아. 형네 부모님...은 빼고. 장인어른 장모님만 봐준다.
SNS 그따위 거 만들어봤자 모르는 사람한테 메세지오고, 터져나가는 알림창에 배터리나 닳겠지. 이 모든 사실을 제 입으로 말하는 박지훈은 분명 재수 없었지만 그럴 만한 얼굴이라 다들 입을 닥쳤다. 입학 첫 한 달간 얼굴 탓에 경영학과에 그 분, 으로 통하며 대숲에 하루에 한 번 출석체크를 하던 잘생긴 신입생 박지훈은 두 달이 지난 뒤에는 성격 탓에 통상 경영학과 개(걔 아니고 개다.) 로 불렸다. 쟤 얼굴만 보면 순한 강아지 같이 생겨가지고는 알고보면 개새끼도 저런 개새끼가 없다, 그래서 별명이 개였다. 한 해 신입생만도 600명이 넘는 경영학과에서 그 분, 혹은 개(다시 말하지만, 걔는아니다.) 따위의 모호한 지칭으로도 모두가 알아듣는 존재라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개 외에도 경영학과 뒤에 붙는 말은 다양하게 변용되기 일쑤였는데 예를 들면 그 새끼, 또라이 등 욕설이 대다수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다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개를 갖다붙이기엔 개에게 미안할 정도로 지랄맞은 그 성질머리, 근데 그 성질머리마저 커버되는 정도의 처연한 미모가 박지훈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가끔 뭘 모르는 뉴비가 경영학과 건물에서 개 키우나요? 종이 어떻게 되나요? 간식 줘도 되나요? 따위를 물으면 친절한 경영학과 학우들은 종은 일단 인간은 아니며 개의 이름은 박지훈인데 건드리면 무니 간식은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피해가라고 일러주었다. 주 출몰 구역은 경영관 2층 흡연구역과 3층 라운지요! 이런 꿀팁을 전해주는 건 보통 방금 절교당한 박지훈의 동기들이었다. 그리고 라이관린은 입학 후 한 달간, 박지훈을 놀리느라 박지훈이 언급되는 모든 대숲글을 퍼나르는 지훈의 동기들을 피해 제 동기의 아이디를 빌려서 매번 댓글을 달았다. 저기, 그 분 애인 있대요. 오래 만났다는데요? 경영 그 분 애인 없는 거 유명하다며 루머 유포하지 말라고 답글 테러를 당한 동기의 짜증은 한 귀로 듣고 넘겼다. 뭐가 루머야, 내가 그 형 애인인데.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게 너무 유명해져서 다들 농담처럼 반응했다. 워낙에 박지훈이 질색팔색을 하며 관린이는 좋은 사람 만나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 더 그랬다. 놀리는 제 동기들에게는 정색을 하며 짜증내놓고 관린에게는 웃으면서 관린아, 너도 좀 아니라고 해. 이러다 다들 진짜인 줄 안다니까? 너 그러다 인연도 놓친다? 하는 지훈을 보며 관린은 속이 터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진짜, 내가 속이 터져서. 형이 제일 예쁘고 제일 착하고 제일 똑똑한데, 내가 너 말고 누굴 만나.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면 그건 속이 터지다못해 한으로 만리장성을 쌓아버린 제 탓일 거라고, 관린은 생각했다.
문을 밀며 들어서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진동을 했다. 실험실에 있는 소독용 알코올을 엎었을 때나 나는 농도였다. 멀리 구석에 웅크리고 잠든 지훈이 보였다. 솔직하게는, 들어오면서부터 지훈 밖에는 안 보였다. 추운가? 어디 아픈가? 자세가 불편한 듯 둥글게 웅크린 지훈의 표정이 좋질 못했다. 그걸 보던 관린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요 근래 들어 자주 찌푸리다보니 그 비슷하게 주름이 잡힌 것도 같았다. 형이 못생겨졌다고 싫어하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라는게 참 그랬다. 박지훈 내 얼굴 예쁘다고 좋아하는데. 생각의 연쇄를 끊어낸 것은 두어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굵직한 목소리였다.
“개 주인 왔어?”
주인. 사실 관린은 이 호칭을 좋아했다. 내가, 형의, 주인. 지훈의 경고를 무시하고 너네 둘이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냐? 하면서 낄낄거리는 지훈의 동기들마저 조금 예뻐보일만큼 그랬다. 지훈은 들을 때마다 질색했지만, 지금 지훈은 뭘 말해도 알아들을 상태가 아닌 듯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형, 잠깐만. 으응, 관리니야? 응. 자, 팔. 옳지. 됐다. 순한 양처럼 관린의 등에 업히는 지훈을 본 동기들이 혀를 찼다. 진짜, 적응 안돼. 쟤 저러는 거.
“그럼 이제 데려가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마시게 두지 마요.”
“지가 지 잔에 붓는 걸 어떡하냐?”
“말렸어야지.”
개를 무슨 수로 말려? 쟤가 말린다고 들을 애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어이없어 했지만 관린은 여전히 지훈을 말리지 않은 선배놈들 모두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우리 형이 얼마나 착한데, 말리면 당연히 알겠다고 했을 것을.
“그건 알아서들 하시고, ……그래도 혹시 또 형이 술 마시다 잠들면-“
“너 부를게. 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챙겨서 가라.”
확답을 받아낸 관린이 발로 미닫이 문을 밀었다. 간다는 인사도 안 해. 저 새끼도 참. 말이 묘하게 짧은 것 같기도 하고. 투덜거리던 사내들은 출입문 반대쪽 테이블 구석에서 들려오는 야 쟤 밑잔 까는데? 소리에 금세 시선을 돌렸다. 뭐? 이 새끼가, 어디서 양심도 없이 밑잔을 깔아, 깔기를. 야, 마셔!
형, 나중에 나랑 결혼하자.
나랑 하게? 우리 반에 수빈인가, 걔랑 하는 거 아니었어?
그건 그 누나가 억지로 그런거야. 나는 형이랑 하고 싶은데……나는 형이 제일 좋단 말이야.
나도 네가 제일 좋아.
진짜지?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다. 지훈은 깨질듯한 이마를 짚으며 느릿느릿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술기운이 몰고 온 졸음이 완전히 가시질 않아서 시야는 여전히 흐릿흐릿, 깜박깜박 했다. 쪽팔리게, 또 이 꿈이야. 그래도 짧은 꿈에서 본 어릴 적의 관린은 정말 예뻤다. 그 때는 울음도 많았고 또래 애들보다도 한 뼘 가까이 더 작아서, 당시 골목에서 제일 키가 크던 지훈보다는 두 뼘 가까이가 더 작았다. 그리고 지금의 관린은 지금의 지훈보다 한 뼘은 더 컸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언제 식물처럼 이렇게 쑥쑥 자라서는. 지훈은 올망졸망한 눈으로 저를 보던 어릴 적 관린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열 오른 얼굴에 닿아오는 밤바람이 적당히 시원했다. 봄이긴 봄이었다.
“형.”
“어……?”
“자.”
관린이 지훈의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까맣고 하얗고, 네모난. 빨대가 꽂혀있기에 입에 물었다. 쫍, 하는 소리가 났다. 관린이 작게 웃었다. 귀엽네, 박지훈. 이건 잘못 들은 것 같다고 지훈은 생각한다. 관린이가,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를 리가 없는데. 알코올에 절어버린 뇌가 느리게 입 안에 들어온 액체의 정체를 분석했다. 초코우유였다.
“속 아프지 말라고. 형 어릴 때 이거 좋아했잖아.”
“응? ……응.”
와, 그것도 기억해? 나도, 나도 너 뭐 좋아하는지 알아. 너는, 유치원 뒤에서 키우던 토끼도 좋아하고, 우리집 맥스도 좋아하고,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고, 파란색도 좋아하고, 응. 오징어 튀김보다는 야채튀김 좋아하고. 또…….
“박지훈 좋아해.”
뭐야, 나도 알아. 지훈의 입술이 삐죽였다. 그걸 보며 관린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형이 뭘 알아, 내가 형 좋아하는 걸. 하나도 모르잖아. 알면 네가 어떻게 나한테 다른 사람 만나라고 해. 지금까지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박지훈이 너무 소중해서, 조금이라도 부서뜨리기 싫어서. 함부로 욕심을 냈다가는 결국 판도라의 상자가 완전히 열려버릴 것 같아서.
“응. 나도 알아, 박지훈이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니가 뭘 알아.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니거는, 나랑 달라. 나는, 진짜…….”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라이관린의 예상에는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뭐?”
“내가, 너 진짜……. 좋아해, 내가, 지인짜로…….”
의식이 가물가물한지 지훈의 눈이 깜박깜박했다. 씨이, 왜 자꾸 눈이 감기지. 나는 관린이 보고 싶은데.
“나 보고 싶어?”
응. 많이 보고 싶었어, 정말로. 그리고 암전이었다. 아 박지훈! 잠깐만. 나 좋아해? 진짜? 관린의 목소리가 꿈 저편으로 흩어졌다. 흠냐, 형 잠 좀 자자…….
진짜, 진짜아로…… 약속? 자, 얼른 손가락 줘. 됐지? 이제 믿을 수 있지? 내가 너 진짜로, 좋아해. 진짜, 진짜로…… 뽀뽀하고 싶냐고? ……당연하지. 씨이. 근데 어릴 때만 해주고, 커서는 안해주고……. 어, 야 뭐야 지금 해준다고? 잠깐만, 심장 터지면 어떡해. 진짜 안 들려? 막 뛰는데? 헉 뭐야 관린이가 나한테 뽀뽀했어 꿈이네 또…… 뭐? 이런 꿈 꾼 적 많았냐고? ……그으러엄.
아 씨발. 사고쳤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아, 이대로 숨참고 콱 기절해버려? 시발, 필름 끊긴척 해야 하나. 어떡하지.
“형! 박지훈!”
쾅쾅쾅. 문이 부서져라 치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악, 깜짝아! 술을 진탕 마신 탓에 안그래도 아프던 머리가 정말 골이 깨지듯이 아파왔다.
“관린아, 잠깐만…….”
형 진짜 죽을 것 같애…… 지훈의 엄살 섞인 목소리에 문 밖에 선 관린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일단 나와 봐. 나 형한테 할 말 있어.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빨리 나와야 해? 나 거실에 있을거야, 알겠지? 두어발짝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진짜 어떡하지, 나.
어느 날이다. 박지훈은 아직도 살고 있는 동네, 그 동네 골목대장이던 일곱 살 박지훈 앞에서 제 어머니의 팔을 붙든 채 뒤에 숨어있던 다섯 살의 라이관린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너는 이름이 뭐니? 박지훈이요. 일곱 살이고, 저기 유치원 토끼반이요. 태권도는 이제 까만띠에요! 어머, 관린아. 뭐해, 얼른 형한테 인사해줘야지. 그렇게 쭈뼛쭈뼛 고개를 내밀며 작게 인사를 건네던 말간 얼굴을 본 순간, 박지훈은 라이관린을 좋아하게 됐다. 그게 여전히 이어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관린의 부모님은 해외 출장이 잦았다. 애초에 대만인이 일 때문에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보니 이 땅에마땅히 맡길 친척도 없어 출장마다 아이를 동행하다보니 어린 관린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 되었다. 그런 관린과 지훈이 금방 친해진 것은 관린의 부모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동안은 이번에는 프랑스로 갈거야, 같은 말에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관린은 지훈과 친해지고 나서는 나 안 가면 안 돼? 하며 제 부모를 향해 가기 싫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그래도 부모가 일하는 동안 호텔 방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관린이 걱정되었던 관린의 부모님은 관린이 나랑 같이 자면 되잖아! 하며 제 부모를 조른 지훈과 도자기 인형같던 아이를 예뻐하던 지훈 부모의 수월한 허락 덕에 관린을 옆집에 부탁한 채 해외를 돌아다녔다. 형아, 같이 자면 안돼? 형, 손잡아 주면 안돼? 형, 뽀뽀해줘. 지훈 외에는 여전히 낯을 가리던 관린은 지훈의 손을 많이 탔고 어린 지훈은 관린이 제게 이것저것 부탁하는 것이 뿌듯하면서도 좋았다. 남들은 어린 동생이 자꾸 붙으면 귀찮다던데, 지훈은 그런 건 하나도 몰랐다. 그냥, 관린이 좋았다.
그렇게 계속 붙어있던 둘이지만, 관린이 한국 나이로 중학교 2학년, 지훈이 고등학교 1학년이던 때 관린의 부모가 한국에 파견왔던 기간이 끝났다. 대만에 돌아가게 되자 소리없이 큰 눈으로 눈물만 뚝뚝, 쉬지 않고 떨구며 인형처럼 울던, 그 때까지도 또래보다 작던 관린은 어느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며 훌쩍 큰 채 고등학교 체육복을 입고 웃고 있는 사진을 보내왔다. 당시 고3이었던 지훈은 그저, 그 사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꿈에서 봐서 언제 키가 이렇게 컸냐고 했더니 관린이 웃어줬던 것뿐인데. 그저 그런 꿈이었는데. 지훈은 다음 날 아침, 축축한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분명 처음에는 연한 주홍빛, 아니면 연한 분홍빛. 뭐 그 정도였을 텐데. 색을 더해가던 감정의 색은 지훈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진한 붉은색이 되었다. 그러게,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지금 와서 따져봐야 소용없었다.
"형."
"어, 어?"
"나 좋아해?"
우리 관린이가, 원래 이렇게 직설적이었던가요...... 지훈은 이마를 짚었다. 이걸 어떡하지.
"그게, 관린아―"
"나는 형 좋아해."
관린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다. 나는 술김에 좋아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되게 떨었던 것 같은데. 지훈은 그게 괜히 억울했다. 뭐야, 어차피 수습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니야?
"형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여."
"내가 뭐."
"나는 형이랑 연애를 하고 싶은데, 형은 아니야?"
너 진짜 진심이야? 외치며 지훈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 지훈의 앞에 관린이 곱게 놓아준 망고패션후르츠 블렌디드가 촤르륵 테이블 위에 쏟아졌다. 형, 좀 앉아봐. 사람들 다 쳐다본다. 나야 뭐, 세상 사람 다 알아도 되지만. 딸기 요거트 블렌디드를 쭉 빨고 있던 관린이 덤덤히 말했다. 아, 미안. 지훈은 금세 주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말이 안되니까 그렇지. 이 상황이."
"뭐가. 내가 형을 좋아하는게?"
"그럼 너는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안될 건 또 뭐야. 그렇게 따지면 나는 형을 좋아할만한 이유가 충분한데, 형은 내가 왜 좋아? 나는 그게 더 신기한데."
"야, 그래도 짚을 건 짚고 넘어가자."
"뭐를?"
"누가봐도, 내가 널 좋아하면 좋아했지 네가 날 왜 좋아해. 누가봐도 네가 훨씬, 훨씬 예쁘고 똑똑하고 착하고...... 여튼 너는 완벽한데."
아진짜박지훈이귀여운걸어떡하지.
진지한 얼굴로 '네가 훨씬 완벽해 너야말로 좋아할 이유가 충분해 눈이 제대로 달렸으면 너를 좋아할거야 어, 나도 물론 눈이 제대로 달렸긴 한데....' 따위를 중얼거리기 시작한 지훈을 보며 관린은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참자, 참아라, 라이관린. 여기서 키스하면 사귀기도 전에 차인다. 진짜다.
"저기 형."
"응."
"어렵게 생각해야 해? 내가 형을 좋아하고, 형도 나를 좋아하는거면, 연애를 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아니, 너희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나를."
왜. 우리 엄마아빠는 다 아는데. 형 그거 몰랐어? 대만은 동성혼 합법 국가잖아. 나는 형네 부모님 허락 받는 게 더 걱정인데. 관린은 태연하게 말했고 지훈은 벙쪘다. 뭐야, 나만 유교남이야? 나만 또 이렇게 사회의 편견에 갇혀서 힘들어하는 게이가 어쩌고 걱정하면서 신파 찍을 준비중이었던 거야? 지훈은 괜히 억울했다. 이렇게 쉽게 생각해도, 되나? 진짜로? 그리고 관린이 불쑥 다가왔다. 야, 조심! 조심해! 아까 지훈이 일어나며 엎어버린 망고패션후르츠 블렌디드가 관린의 흰 셔츠 끝자락을 물들이는 것을 보며 지훈이 안절부절했다. 그러다 훅, 숨을 들이쉬었다. 지훈의 코 앞에서 경영 개 주인 이전에 화생공 남신으로 불리던 조각상이 그림처럼 웃고 있었다.
"형."
"......왜."
"이제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 해보는 거 어때, 우리."
해볼까, 그럼. 그동안 지훈을 고민하게 하던 모든 것들이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자는 관린의 말에 순식간에 흐려졌다. 관린의 입에서 나오는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단어가 왠지 모르게 좀,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거다. 지훈은 더이상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이젠 모르겠다. 한 번쯤은 쉽게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 미세하게 움직이는 지훈의 턱끝을 보고 있던 관린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는 정말 공식적으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발그레 물드는 지훈의 귀끝을 보고 있던 관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경영 개 애인 없다고 하는 새끼들은 전부 루머 유포로 댓글 신고 먹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