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기나긴 유학생활을 마쳤을 때 관린은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온전히 정착하는 삶을 꿈꾸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더는 한국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결정을 내린 뒤에는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부동산에 방을 내놓은 날부터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땐 분명 대형 캐리어 두 개와 백팩이 전부였는데, 다시 돌아갈 때가 되니 캐리어 두 개로는 어림도 없었다. 관린은 국제 택배로 부칠 것들을 박스에 하나씩 담으면서 그것들에 가치를 매겼다. 버려도 될 것과 버리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진열장에 나란히 올려놓은 카카오 인형들부터 버리는 비닐에 담아놓고 집안을 둘러봤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하나 들여놓은 가구는 물론이고, 크고 작은 가재도구 또한 대부분 남겨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득해진다. 그러나 관린은 자신이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집의 아늑함을 만드는 건, 사는 이의 애정이 주였다. 집이란 간단한 단어에서 내 집, 내 공간이 되어가는 과정. 관린은 이 집에 처음 방문하던 그날부터 그러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낡은 빌라의 원룸이었지만, 위치가 좋고 정남향인 집이었다. 한가운데 넓은 창으로 빛과 어둠이 번갈아 매몰되는 과정이 커다란 전시 작품처럼 비추곤 했다. 리모델링을 거쳐 화장실이 깨끗했고, 금술 좋은 집주인 노부부가 선했다. 그런 이유로 관린이 내놓은 관린의 집은 금방 나갔다.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관린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이 집을 보자마자 계약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오래 머물 생각으로 신중하게 구한 집이었으나 계획이 달라지고 말았다.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게 됐다. 관린은 오랜만에 노트북으로 부친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막학기 내내 바쁘게 지내느라 주로 텍스트로만 연락을 주고받다가, 오랜만에 얼굴 보며 대만어로 대화하려니 조금 어렵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중국어가 많이 줄었네. 웃는 부친을 보며, 관린도 웃고 말았다. 역시 원어민은 함부로 못 속이겠네요. 돌아가면 금방 원상복귀 될 거예요. 저 말은 금방 늘잖아요. 아들의 대답에 아버지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한테 연락은 했니?했죠. 알겠다고 하셨어요. 조금 서운해 하셨지만요. 관린의 말에 부친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자기 왜 돌아가겠다고 했는지 안 물어봐요? 만나게 되면 어련히 얘기할까 싶었는데. 울 아부지 여전하시네. 한국어로 뭐라고 한 거야?여전하다고 했어요. 그럼 여전하지. 돌아가면 다 말씀드릴게요. 한국은 어땠어?관린은 곤란한 질문이라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웃었다. 글쎄요. 두리뭉실한 답을 했다가 다시 덧붙였다. 외로움을 배웠어요. 그래서 엄마보다는 아빠한테 가고 싶어졌나 봐요. 엄마는 새남편이 있지만, 아빠는 아들 말곤 없잖아요. 모니터 안에서 머그잔에 든 차를 한 모금 마시던 부친이 한 박자 느리게 카메라를 향해 눈을 흘겼다. 무례해졌어.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대요. 나는 전부터 그 말이 싫더라. 관린은 모니터 속의 아버지를 가만 응시하다가 푸스스 웃었다. 아빠는 왜 연애 안 해요? 전에는 나 때문인가 싶었는데, 커서 생각해보니 꼭 나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전엔 너 때문이었어. 네가 어렸으니까. 그다음엔 일 때문에 바빴고 또……. 엄마 때문이죠? 글쎄. 아니라고 하고 싶구나. 엄마를 너무 사랑한 탓인가요. 너무 후회했던 탓이지.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얼마나 사랑하셨어요? 엄마요. 얼마나 사랑했는지 제삼자한테 표현하는 건 사실 별로 의미가 없어. 그건 어차피 나랑 네 엄마만 아는 일이니까. 그래도 가늠해 보자면요.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이. 많이 사랑했어. 그래서 결혼했던 건데. 그게 좀, 생각만큼 순조롭지 못했지. 그게 다야. 관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화면너머 부친의 얼굴이 전보다 많이 늙어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그만큼 관린이 자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관린은 주먹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며 애써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화면너머 부친에게 고했다. 보고 싶어요.
대만으로 부칠 택배를 거의 갈무리 지었을 때, 관린은 지인들에게 돌아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웃기게도 다들 하나같이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럼 관린은 웃었다. 갑자기 왜라니. 내가 평생 여기 있기라도 할 줄 알았어? 관린이 장난기와 진지함을 반씩 섞어 대답하면, 누구도 더는 깊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언제가 괜찮은지 날짜를 묻고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출국까지는 어느덧 이주일이 남아 있었다. 관린은 날마다 사람들을 만나 이틀에 한 번 꼴로 취한 채 귀가했다. 날이 갈수록 집안 물건도 하나씩 줄었다. 버리기엔 쓸모가 있는 가구나 가전들을 지인들에게 선물하듯 넘겼기 때문이다. 꼭지가 헐거워진 것 말고 이상 없는 전기밥솥은 집주인에게 말해 남겨두고 가기로 했다. 나날이 집이 넓게 느껴졌다. 나날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는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귀갓길에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택시를 잡으려고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다가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같이 빠져나왔던 것이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기가 길바닥 위를 튀어 올랐다. 액정 오른쪽 아래 기다란 금이 갔다. 관린은 취해서 금이 간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다음날 알았다. 액정에 금이 간 걸 알아차리고 다른 곳도 깨진 곳이 없나 꼼꼼히 살피는데, 새삼 잔기스가 많이 나 있었다. 핸드폰을 험하게 쓰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세밀하게 보니 애지중지하는 편도 아니었다. 햇수를 새어보니 핸드폰을 바꾼 지도 어느덧 3년째였다. 배터리가 급감하는 현상도 문제였다. 돌아가면 핸드폰부터 바꿔야겠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혹시 몰라 노트북에 연결해 백업을 진행했다. 완료까지 오랜 시간이 예상되었다. 백업되는 동안 관린은 핸드폰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일련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잔여물 같은 사진이 예고도 없이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 팠다. 다 지워버린 줄 알았는데 한 장이 남아 있었다. 핸드폰을 새로 바꾼 지 하루가 되던 날, 같이 늦은 점심을 먹고 대화를 나누다, 첫 사진은 형을 찍고 싶다며 관린이 찍은 그의 사진. 싫은 기색 없이 편안한 얼굴과 자세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을, 액정 밖의 관린이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관린은 사진 속 그의 나이보다 한 살이 많아졌고, 한때 자신이 전부를 바쳐 사랑하던 그 사람이 기억보다 앳된 얼굴이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관린은 그가 가진 상반된 성질을 낱낱이 사랑했다. 그만의 단단함과 부드러움, 어느 한쪽도 어설프거나 작위적이지 않았다. 예전에 관린은 그것이 두 살이라는 나이차에서 오는 어른스러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그건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다. 같은 나이를 겪어본 자신조차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박지훈. 이름을 떠올렸을 뿐인데 명치끝이 아렸다. 박지훈. 관린은 아주 오랜만에, 오랫동안 지훈을 생각했다. 눈으로 보던 지훈의 생김새와 손으로 만지던 촉감들을 되짚어봤다. 그리고 지훈이 했던 말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감정과 상황과 현재의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자던 과거 지훈의 말이 기억났다. 넌 가끔 필요 이상으로 절제하는 것 같아.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느껴지게. 지훈이 인상을 쓰고 어렵게 뱉은 말을, 관린은 조금도 새겨듣지 않았다. 낭비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야. 상처가 될 걸 알면서 안하느니만 못한 대답을 하고 시선을 피했었다. 그런 시기였다. 누가 더 모진 말로 실망감을 안길지의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 관린은 어떤 슬픈 영화를 봐도 우는 법이 없었고, 지훈은 영화 속 주인공이 겪는 불행에 내 일처럼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가끔씩, 지훈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훈은 이내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관린은 그런 지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때의 지훈이 얼마나 깊이 상심했는지. 얼마나 울고 싶은 기분이었는지. 그래서 얼마나 가엾고 약해빠진 얼굴이었는지, 관린은 몰랐다.
사랑이 일어나는 건 예기치 못한 사고와도 같았다. 그래서 누구도 노련히 대응하는 법을 몰랐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유학생 라이관린과 도서관 근로 장학생 박지훈은 어느 봄에 만났다. 관린은 < 영어속담과 함께 읽는 고사성어 >라는 책을 대출받던 중 지훈을 처음 눈에 담았다. 시선을 빼앗겼다는 진부한 표현이 어울리던 순간이었다. 지훈의 숙인 얼굴을 가만히 훔쳐보다, 눈이 마주쳤을 때 관린은 책을 가지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그리고 반납일까지 착실하게 지훈을 생각했다. 책은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관린은 반납일자에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두 번째 빌린 책은 낡은 고전문학이었는데, 관린은 그 제목을 잊었다. 책을 빌려온 날부터 반납하던 날까지 지훈을 생각했다. 두 번째 책은 빌린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반납을 했다. 빌릴 책과 반납할 책을 같이 들고 지훈이 있는 데스크에서 대출을 받았다. 세 번째, 네 번째도 대출부터 반납까지의 기간은 일주일 미만이었다. 다섯 번째 책을 대출받던 날, 관린이 내민 책과 학생증을 받아 바코드를 찍으면서 지훈은 무심히 물었다. 읽긴 읽어요? 관린은 지훈의 내려앉은 속눈썹을 바라보며 어느 정도의 무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솔직한 답을 했다. 아니요. 안 읽어요. 관린의 뻔뻔한 대답에 지훈이 시선을 들었고, 관린은 미소를 지었다. 누굴 보러오고 싶은데 다른 명분이 없어서요. 이렇게 책 빌리는 것 말고는. 지훈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절차대로 반납일을 안내하고 학생증을 돌려줄 뿐이었다. 관린은 도서관을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했어야 했는데. 입구에 서서 이마를 짚고 있는데 누군가 관린의 등을 두드렸다. 돌아보자 지훈이었다. 어? 하면서 관린은 눈 녹듯 웃었고, 시선이 맞닿았을 때 지훈은 관린에게 말했다. 30분 기다릴 수 있어요? 나 30분이면 끝나요.
이상할 정도로 서로에게 끌렸다. 닮은 듯 다른 점이 좋았다. 서로를 편안하게 했고, 또 궁금하게 만들었다. 관린은 지훈이 데스크를 보는 날이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나타났다. 기다려도 되는 날이면 지훈을 기다렸다. 수요일이면 지훈은 다섯 시에 퇴근했다. 어느 수요일, 관린은 도서관 입구에 서있었다. 지훈은 웃으며 관린에게 걸어갔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반 정도였다. 지훈이 여덟시부터 다음 알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학교 근처에서 같이 저녁을 먹거나, 낮보다 한적해진 캠퍼스를 천천히 걸었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심오한 것까지 묻고 대답해가며 하나씩 서로를 알아가는 게 꼭 놀이 같았다. 고양이가 좋아, 아니면 강아지가 좋아.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신은 있을까, 또 귀신은 있을까. 말을 주고 받다보면 금방 시간이 갔다.
학교 앞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로 같이 이른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지훈은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으며, 원래 서울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학교 때문에 올라오게 된 것이라고. 관린은 능청스럽게 자신도 그렇다고 답했다. 나도 서울 사람은 아니에요. 관린의 자연스러운 말에 지훈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서울 사람은 아니라니. 한국 사람도 아니잖아. 관린은 지훈이 웃는 게 좋아서 그냥 따라 웃었다. 형도 반의반쯤은 이방인이네요. 관린이 말했다. 지훈은 관린의 뺨에 피어난 보조개가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물었다. 있잖아, 너도 네가 귀여운 걸 알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통화했다. 지훈이 새벽에 전화를 걸어도 관린은 받았다. 그날도 그랬다. 새벽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지훈은 조금 취해 있었다. 술집 앞에 쪼그려 앉아 바람을 쐬다가 관린에게 전화를 걸게 된 거였다. 관린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나는 그런 거 몰라. 졸리지? 다음에 통화할까? 깨워놓고 이제 와서?우리 겨우… 16초 통화했는데?낮게 잠긴 관린의 음성이 갈라졌고, 지훈은 조용히 웃었다. 이제 집이에요? 아니, 아직도 밖이야. 밖에서 뭐해요?술 마시고 바람 쐬는 중. 완전 어른 같아. 어른 맞아. 많이 취했어요? 별로… 그냥 취했다 정도. 근데 내 생각이 났구나. 어. 갑자기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솔직해서 좋네. 관린아. 네. 노래 불러줄래? 지훈의 뜬금없는 노래 요청에 귀에 댄 스피커 너머에서 관린이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갑자기요? 싫으면 말구.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관린이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났다. 관린은 지훈을 위해 노래했다. I found a love for me… Darling, just dive right in And follow my lead…… I found a boy, beautiful and sweet. I never knew you were the someone waiting for me. 중간 중간 가사가 기억나지 않을 때마다 관린은 흐드러지게 웃으며 작게 허밍을 했고, 그럼 지훈도 같이 웃었다. When you said you looked a mess, I whispered underneath my breath. But you heard it, darling, you look perfect tonight. 관린이 노래를 마쳤을 때, 지훈은 귀에 댄 핸드폰을 고쳐 잡고 누가 들을 새라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우리는 노련하게 대응하는 법을 몰랐지만, 늘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 최선의 방법 중 하나였다. 너와 내가 합쳐져 우리가 되는 것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고, 속도와 상관없이 과정을 기쁘게 여겼다. 우리를 위한 선택이 곧 나를 위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관린의 자취방에 하나씩 늘어나는 지훈의 물건들이 그 증거였다. 뿐만 아니라 욕실 벽에 붙은 칫솔걸이가 두 개, 베개도 두 개, 싱크대 건조대에 물기가 묻은 채 엎어진 식기도 두 개씩 쌍을 이루었다. 유일했던 테이블 의자도 두 개가 되었다. 모양은 다르지만 원목이라는 점이 같았다. 둘에게 슈퍼싱글 사이즈의 침대는 전혀 좁지 않았다. 사막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모래수렁을 밟고 서있는 듯이. 너의 깊은 곳에서 기꺼이 잠겨죽을 듯이. 한 뼘조차 남기지 않고 부둥켜안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관린은 지훈으로 인하여 자신의 눈동자가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갈색에 가깝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지훈은 관린으로 인하여 자신의 뒷목에 작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은하의 충돌은 인간의 사랑을 닮았대. 어느 날 지훈이 꺼낸 말이었다. 눈감은 관린에게 팔베개를 내어준 채 마주보고 누워서. 머리맡을 비추는 따뜻한 빛깔의 스탠드 조명이 은은했다. 관린은 잠이 들락 말락 나른한 기분으로 입술만 움직여 대거리했다. 더 말해봐. 지훈은 나긋하게 두 개의 은하가 충돌하는 과정을 관린에게 설명했다. 관린은 가끔 응. 응. 소리를 내면서 지훈의 얘기를 들었다. 지훈이 말하길, 광활한 우주 속에 어떤 두 개 은하는 서로의 강력한 중력에 이끌린다고 했다. 연결된 듯 맞닿아 내부의 물질을 교환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충돌과 어긋남을 반복한 끝에, 이윽고 하나의 은하로 결합을 이루어낸다고. 그것이 사랑과 닮았다고. 지훈의 말이 끝났을 때 관린은 눈을 떴다. 그러네. 사랑 같네. 답을 하며 입술을 포갰다. 쪽. 소리를 내고 물러나서 지훈은 관린의 뺨을 덮었다. 관린은 편안하게 웃었다. 형이 전에 그랬잖아. 사랑은 화학작용이라고. 관린의 나직한 말에 지훈이 자그만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랬지. 관린은 지훈의 눈을 보며 계속 말했다. 사랑을 하면 대뇌에서 화학물질이 분비돼서 가슴이 뛰고, 끌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상대 얼굴만 봐도 행복해지는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거라고. 근데 그것보단 확실히, 은하 충돌 얘기가 나은 것 같아. 관린의 말에 지훈이 푸스스 웃었다. 왜? 묻자 관린은 이렇게 답했다. 그냥 그게 더 운명 같아서. 우리 같아서.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지훈은 관린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래. 그냥 이것을 운명이라 여기자. 그것으로밖엔 설명되지 않음을 맹신하자.
관린은 가난을 몰랐고, 지훈은 가난했다. 학교 때문에 본가를 떠나 서울로 상경하면서부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모든 걸 스스로 해결 봐야 했다. 스무 살부터 고모 댁에 얹혀 눈칫밥을 먹으며, 장학금과 대출, 그리고 스스로 벌어낸 돈으로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했다. 방학동안 허리띠를 졸라매 악착같이 저축해도 학기가 시작되면 없었던 듯이 사라졌다. 해볼 만한 알바는 거의 해봤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관린과 처음 만나던 때부터 지훈은 학교 도서관 근로 장학생 말고도 중학생 과외 두 개와 호프집 야간 서빙을 병행하고 있었다. 일이 없는 날은 격주의 목요일뿐이었다. 그래서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해? 관린이 멋도 모르고 물어보면, 지훈은 ‘넌 몰라’ 하며 웃고 말았다. 부모님이 제공한 돈으로 타국에 유학을 와서 남향의 방까지 구할 여유가 있는 넌 절대 모른다고. 그리고 실제로 관린은 지훈의 사정을 몰랐다. 모를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관린의 앞에서만큼은 가난을 시인하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면 관린과 하고 있는 이것까지 제 스스로 사치로 폄하하게 될까봐. 그렇기엔 이것이 너무도 사랑이라, 지훈은 그럴 수 없었다.
관린은 정착을 꿈꾸었다. 한 군데 정착해서 더 이상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는 삶. 기간이 정해진 휴가를 갈 때에만 짐을 꾸리는 삶. 구성된 가족과 주변인들과 나의 위치가 변하지 않는 삶. 관린은 어렸을 때부터 비행기를 많이 탔다. 부모님 두 분 다 여행을 좋아해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매년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열에 아홉은 관린을 부러워만 했다. 그럼 관린은 그냥 웃고 말았다. 부러운 일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건 그다지 소용없게 느껴졌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관린은 대만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거기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열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부터 표류하는 삶을 살았다. 아빠를 따라 대만으로 갔다가, 다시 엄마가 있는 미국을 넘나들었다. 한때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파경을 맞게 되는지, 모두가 축복한 그들의 연애결혼이 얼마나 지독하게 망가지는지 관린은 열 살에 똑똑히 목격했다.
외아들인 관린의 양육권으로 자주 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가끔씩 집안의 물건이 부서지던 때였다. 어느 날 관린은 아래층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음에 잠에서 깼다. 절대로 내려오지 말라던 엄마의 경고를 어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늘 깔끔했던 거실은 눈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마치 꾸며진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았다. 아들이 내려온 줄도 모르고 둘은 언성을 높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관린은 관객처럼 가만히 부모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화가 난 엄마가 홧김에 유리컵을 집어던지게 된 것이다. 던진 컵은 운명처럼 관린에게 날아들었다. 유리컵에 머리통을 맞고 산산이 부서진 투명한 파편 위로 처참히 쓰러졌다.
아직도 기억나. 할로윈 분장처럼 얼굴로 피가 흐르던 게. 진짜 대박 엄청 아팠거든. 관린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마주보는 자세로 누워있던 지훈은 인상을 쓰며 관린의 뺨을 감쌌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관린은 지훈을 위해 계속 그때를 회상했다.
눈을 감았다 떠보니 병원이었고, 곁에는 아빠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엄마는 없었다. 깨어난 아들을 보더니 아빠는 ‘이제 괜찮아’ 하고 말했다. 뭐가요? 관린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런데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아빠가 먼저 울었다. 관린의 작은 손을 붙들고 하염없이. 관린은 아빠가 우는 것을 그때 처음 봤다. 정확히는 어른 남자가 그렇게 애처럼 울기도 하는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일이 있은 후, 관린은 아빠를 따라 대만으로 돌아가게 됐다. 어린 아들은 종종 무언가 깨지는 환청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 안방에 가보면, 아빠는 가끔 작게 몸을 웅크린 채 숨죽여 울고 있었다. 그럼 관린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차츰 성장했다. 대만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엄마가 있는 미국으로 보내졌다. 그것이 그들의 약속이었다고 했다. 관린은 그들이 만든 약속에 얌전히 응했다. 커갈수록 다소 유치한 자존심 싸움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순순히 따랐다. 미국에서 관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엄마와 그녀의 새로운 남편, 이렇게 셋이 한집에서 지냈다. 그때쯤엔 적당히 정을 붙이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마다 언제 헤어지더라도 적당히 아쉬울 정도의 정서를 유지했다.
관린이 지훈에게 한국어로 표현하길, 미성년자였던 자신이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아들 된 도리였다고 했다. 어찌 됐건 관린의 부모님이 관린을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도 두 사람 간의 갈등은 팽팽했다. 어느 한쪽도 관린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제게 남은 유일한 보물처럼. 그게 마치 지고이기는 문제가 걸린, 그들만의 게임 같다고 관린은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면 평생에 걸쳐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도.
관린은 자신의 부모가 어른이 된 자신에게 명확히 선택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결정으로 유학을 택했다. 당장은 아무도 택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물론 연락은 주고받았다. 두 분에게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면서 공평하게 안부를 전하는 건 기본이었다. 정착하고 싶은 건 맞지만, 정착하기 위해 한국에 온 건 아니라고 했다. 왜 하필이면 한국이었어? 지훈의 물음에 관린은 완전 진지하게 대답했다. 드라마가 너무 재밌잖아. 지훈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웃음은 잠시였다. 금세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관린에게 입을 맞췄다. 박지훈 동정하지 마. 동정 같은 거 안 해. 그럼 뭐야. 그냥… 그냥 좀, 사랑해서 그래.
지훈은 안정을 꿈꾸었다. 관린이 원하는 정착과 성질이 비슷한 듯 달랐다. 지훈은 안정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안정된 집과 안정된 직장. 안정된 가정과 안정된 행복. 남들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것들을 지훈은 꾸준히 원해왔다.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라 무의식중에 학습된 허상일지라도 남들이 지닌 안정이 너무도 좋아보였다. 기복 없는 안정된 삶과 책임질 수 있는 것들을 마땅히 책임질 수 있는 안정된 사람. 지훈은 단지 그것을 원했다. 겨우 삼백만원 때문에 죽을 결심을 하고, 제대로 죽어버릴 용기도 없으면서 거듭 시원찮은 자살시도를 하고, 빚을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사채를 끌어다 쓰고, 자식에게 가난과 죄책감을 대물림하는 보잘 것 없는 삶은 되지 않기를. 삼백만원 보다 못한, 나약하고 하찮은 목숨은 되지 않기를. 사채 빚 때문에 농약으로 음독자살을 시도하고, 아수라장 같은 응급실 한편에 볼품없이 누워있는 자신의 부친을 보며 열여섯의 지훈은 다짐했다. 결코 저런 삶은 살지 않으리라.
학창시절 지훈은 죽도록 공부하는 것만이,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인 줄 알았다. 그것을 굳게 믿었고, 그래서 죽어라 공부했다. 구원은 셀프니까. 서울에 있는 대학엘 가서 서울에 상경하는 것만이 이 깊숙한 시궁창을 벗어날 유일무이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에게 대학 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지훈은 예상했다는 듯 받아들였다. 아들의 대학 합격 소식에 하늘이 무너진 듯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부모님에게 전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먼저 얘길 꺼낸 것도 그래서였다. 공부해서 장학금도 받고, 일해서 돈도 벌겠다고. 손 벌리지 않겠다고. 꼭 거길 가야만 한다고.
그날 밤 지훈은 안방에서 아빠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누나 잘 지내시죠. 저 막내예요. 네, 잘 지내셨어요? 매형 건강은 좀 어떠세요.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저희는 뭐 그럭저럭 지내요. 네. 알죠. 네. 누나 다름이 아니라…. 지훈이가 올해 대학교에 가게 됐어요. 서울에 K대요. 네네. 가고 싶다고 밤낮 없이 공부하더니 가게 됐네요. 그러게요. 너무 기특하죠. 네. 애가 학교 때문에 서울에서 지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우리 지훈이 좀…. 네. 워낙 얌전한 애라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집안일도 알아서 다 잘해서…. 네. 네, 그럼요. 매형이랑 잘 상의해보시고 연락주세요. 아니에요. 자꾸 신세만 지네요. 미안해요, 누나. 또 연락드릴게요. 아빠가 핸드폰을 귀에서 떼는 것을 보고나서야 지훈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모로 누워 베개를 움켜쥐고 코끝이 따갑도록 눈물을 참았다. 벌써부터 쉽게 울면 안 될 것 같아서.
서울로 올라가던 날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 지훈은 빈자리가 많은 고속버스 창가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했을 때, 이어폰을 꺼내기 위해 가방 앞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납작한 것을 꺼냈다. 예금 통장과 카드였다. 펼친 통장에는 총 92만원의 금액이 들어있었다. 적은 돈을 모으고 모은 흔적이 여러 장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끝으로 미처 100이 되지 못한 숫자가 찍혀 있었다. 지훈은 질끈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울음이 복받쳤다. 허리를 숙이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끔씩 덜컹거리는 서울행 버스 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울었다.
스물의 지훈은 무서울 게 없었다. 써주는 대로 알바를 구해 무작정 일을 했다. 타인의 무례를 참아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담배 냄새가 찌든 당구장에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주 6일, 7시간씩 일을 했다. 첫 알바비를 받아서 한 일은 92만원이 들어있는 예금 통장에 8만원을 채워 넣는 일이었다. 통장정리를 해서 100이 찍힌 것을 보며 지훈은 서글프게 웃었다. 너무도 완전한 모양새였고, 더없이 완벽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100의 수를 유지하기 위해 꽤 오랫동안 아득바득 쓰지 않으려 애썼다. 결국 전역 후에 당장 학교 갈 교통비가 없어 마지못해 쓰게 됐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둘은 서로에게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존재였다. 관린은 예상보다 많이 지훈에게 사랑을 쏟게 됐고, 지훈은 제게 사치라고 여기며 등한시했던 연애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정착한다면 그것으로 100에 가까운 완벽한 안정감을 얻을 수 있진 않을까 하는 무근한 착각에 빠졌다. 사랑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사랑이 대단한 것처럼 느꼈다. 숱한 사랑 이야기 중에서 우리는 좀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던 적이 있었다.
이별은 마치 진행이 느린 병 같았다. 꾸준히 밀려오는 파도에 천천히 깎여나가는 바위처럼 해를 거듭해가며 서로를 좀먹어갔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정확하게 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같이 맞이한 두 번째 겨울이었다. 그날은 지훈이 오랜만에 쉬는 토요일이었고, 관린이 영화를 예매했다며 지훈을 불러낸 날이었다. 지훈은 잠을 자기 위해 관린의 자취방이 아닌 고모집에 있다가 관린의 전화를 받았다. 충혈 된 눈가를 문지르다, 관린의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지친 몸을 이끌고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밖에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데이트를 한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던 날이었다. 그런 날, 그들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강남역 근처 건물 앞에서, 예매해놓은 영화 시간이 늦도록 말다툼을 했다. 내가 뭘 내 멋대로 했다는 건데? 하루 종일 인상 쓰고 있는 거, 하나부터 열까지 다 비위 맞춰주고 있는데. 오랜만에 나와서 밥 먹고 영화 보는 건데, 그게 그렇게 싫었어? 그렇게 나오기가 싫었으면 처음부터 나오기 싫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관린이 짜증난 얼굴을 하며 말했고, 데칼코마니처럼 관린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지훈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러게. 나오기 싫었는데 괜히 나왔다 싶네. 너 같은 것도 애인이라고 좋다고 등신새끼 같이 기어 나왔네, 내가. 뭘 네 멋대로 했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라이관린 너는 네 생각만 해. 내가 날마다 잠이 부족해서 절절매도,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아도, 너는 안중에도 없어. 네가 그런 걸 생각할 리가 없지. 내가 새벽에 퇴근하고 돌아와도 너는 네 잘난 아랫도리 세우기 급급하니까. 내가 왜 쉬는 날만 되면 니네 집 안 가는 지 아직도 모르겠어? 관린은 처음 듣는 말들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훈은 인상을 쓰고 관린을 쳐다보다, 더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당분간 연락하지 마. 그렇게 말을 남기고 지훈이 먼저 뒤를 돌았다. 관린은 지훈을 보내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지훈은 전철을 타고 고모집으로 가는 내내 울음을 참았다.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너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이 첫 번째 파란이었다.
이 주째가 되던 날 밤, 관린은 정말 끝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훈은 전화를 받았다.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붙들고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내다 관린은 어렵게 목소리를 냈다. 연락해서 미안해. 근데 헤어지고 싶지 않아. 형이 싫어하는 건 이제 안할게. 쉬는 날 불러내지도 않을게. 새벽에 형 퇴근하고 와도 손만 잡고 잘게. 다신 안 그럴게. 내가 잘할게. 한 번만 용서해줘. 한 번만 나 받아줘. 나 형 없으면 안 돼. 지훈은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가끔 숨을 뱉는 소리에 관린은 지훈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관린아 너 왜 이렇게 등신 같이 굴어. 나 같은 게 뭐가 좋다고. 등신 같이. 지훈이 울며 간신히 쥐어짜낸 말에, 관린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미안해. 내가 형 좋아해서 미안해. 관린은 지훈에게 사과했다. 지훈이 울어서, 결국 관린도 울었다. 둘은 그날의 통화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핸드폰을 붙들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같이 울던 밤. 어떤 말도 무용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미숙하였고,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위한 선택이 곧 나를 위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다시 봄이 돌아왔을 때에도 둘은 함께였다. 이따금씩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는 건 여전했다. 손 댄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아서, 겉옷을 침대에 벗어놔서, 설거지를 제 때하지 않아서, 서랍을 끝까지 닫지 않아서 둘은 다투었다. 단순히 생활방식이 달라서 다투게 되는 건 아니었다. 감정이 상하기 때문이었다. 쉽게 용인되던 것들이 예민하게 생채기를 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생활에서 빚는 마찰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꼭 같이 보기로 한 영화를 틀어놓고 초반부가 지나기도 전에 잠들곤 하는 지훈 때문에 관린이 서운할 때가 있었고, 같이 마주앉아 밥을 먹는 동안 수시로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관린 때문에 지훈이 기분 상할 때도 있었다. 또, 지훈은 가끔 늦는다는 연락 없이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관린은 가끔 지훈의 부름에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런 시기였다. 의도치 않게 다툼을 만들고 다시 수습하는 게 일이었다. 시들어가는 연애를 심폐소생해가며 간신히 연명해갔다. 그게 다소 피로하다고 느끼던 무렵이었다.
끝까지 닫히지 않는 서랍 때문에 다툰 날이었다. 관린은 당장 내일 마감인 과제를 밤새워 하는 중이었고, 지훈은 알바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씻고 나와서 서랍을 봤는데, 옷이 비죽 나온 채로 닫혀 있었다. 끝까지 닫힌 것도 아니었다. 옷이 걸렸으면 열었다가 다시 넣으라고 수도 없이 얘길 했지만, 관린은 가끔 그렇게 했고, 또 가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투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훈은 조용히 해결했을 것이었다. 평소만큼 그런가 보다 하고 참아줄 의지가 있었다면, 알아서 서랍을 빼내고 흐트러진 옷들을 다시 개어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그날따라 그러기 싫었다. 지훈은 너는 서랍 하나도 제대로 못 닫느냐고 윽박을 질렀다. 관린은 노트북에 고정했던 시선을 지훈에게 돌렸다가, 지훈이 인상 쓰고 있는 걸 보고 일어나서 서랍을 정리했다. 됐지, 만족해? 관린의 그 한마디를 기점으로 언쟁이 벌어졌다.
너 왜 그따위로 말해. 먼저 짜증낸 거, 형이었어. 나 너한테 서랍 닫으라고 얘기한 거 한두 번 아니야. 짜증 안내게 생겼어? 그렇다고 꼭 그렇게 사람 기분 나쁘게 말했어야 했어? 안 그래도 이틀 내내 잠 못 자서 예민한 거 알면서, 좀 좋게 말해줄 수도 있었잖아. 네가 기억 못해서 그렇지, 난 이미 너한테 여러 번 좋게 얘기했어. 네 기분 봐가면서 좋게 얘기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라이관린, 넌 네가 어떤지 모르지. 너 기분 내키면 하고, 안 내키면 쳐다도 안 봐, 너 그래.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그거 가끔 되게 싫고 재수 없는데 그래도 너라서 참았어. 그래서 지금 형이 듣고 싶은 말이 뭐야. 서랍 닫으래서 닫았잖아. 뭘 더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건데. 그동안 나 재수 없는 거 참아줘서 고맙다고 감사 인사라도 해? 그렇게 말하면 형 기분 좀 나아져? 대체 왜 이렇게 짜증이야. 형도 완벽한 거 아니잖아. 가끔 실수할 때 있고, 내가 했던 말 별 거 아니라는 듯 잊을 때 있잖아. 아니, 많잖아. 아니야? 나는 형이 그럴 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 형이 참는 만큼 나도 참아주고 있다고. 이렇게 죽자고 싸우기 싫어서. 그래? 넌 뭘 그렇게 많이 참아줬는데. 말해봐. 나는 뭘 얼마나 어떻게 널 무시했었는데. 제발 사람, 질리게 좀…….
한참 대화 같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다. 감정에 휩쓸려 무책임하게 쏟아지는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차라리 벽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게 이로울 것 같았다. 겨우 서랍 하나야. 겨우 서랍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관린이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훈은 이상하게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급격하게 현기증이 치밀었다. 맞아. 네 말대로 겨우 서랍 하나였어. 겨우 서랍 하나. 한숨처럼 말을 뱉곤 지훈은 그대로 관린을 지나쳐갔다. 관린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훈은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가야 했던 시간보다 이십 분이 지체된 시점이었다. 등 뒤로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은 관린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느리게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서랍장을 봤다. 당장이라도 내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관린은 늦게까지 지훈을 기다렸다. 도어락 열리는 소리를 듣게 된 건, 원래 지훈이 귀가하던 때보다 더 늦은 시각이었다. 늦는다는 연락도 없었다. 환한 센서등 불빛에 관린은 현관으로 고개를 꺾었다. 지훈은 느리게 집안으로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관린을 봤다. 안 잤네. 왜 이렇게 늦었어? 친구 만났어. 무심하게 뱉고는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 닫힌 화장실 안에서 지훈이 속을 게우는 소리가 들렸다. 관린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하다가, 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변기통을 붙들고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지훈의 곁에 앉아서 등을 두드렸다. 그러자 지훈이 관린의 팔을 잡아 내렸다. 됐으니까 나가있어. 관린은 고집을 부리려다 지훈의 말대로 했다. 관린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안에서 문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딸각. 관린은 잠긴 화장실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훈은 계속 속을 게웠다. 고통스럽게. 계속. 계속.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도 지훈은 계속 괴로운 소리를 내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것이 작게 울음으로 바뀌는 것을 듣고, 관린은 착잡하게 눈가를 덮었다. 문밖에서 지훈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훈은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차분히 시간이 흘렀다. 울음이 멎은 뒤에는 세면대 물이 틀어졌다. 씻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다가 수도가 잠겼다. 안이 조용해졌는데 지훈은 나오지 않았다. 관린은 그때서야 지훈을 불렀다. 형. 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화장실 안에서 지훈은 문 옆에 등을 대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 입을 다문 채 무표정하게 있는데도 눈에선 계속 무감하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럼 손끝으로 가만히 훔쳐낼 뿐이었다. 지훈은 기댄 채로 연신 입술을 뜯었다. 피가 나는 줄도 몰랐다. 원래 헤어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친구에게 미쳤냐는 소릴 들을 때까지 술을 퍼마신 거였다. 언젠가 다시, 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서 얘기하자. 형, 제발 문 좀 열어봐. 지훈은 자꾸만 이마에 달라붙는 젖은 머리칼을 몇 번이고 쓸어 넘기다, 끝내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분명 헤어지길 원하고 있는데, 그만두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봤는데, 나는 서울에서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문 안에서 지훈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관린은 문에 이마를 대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지훈에게 버려질까봐, 정말 끝일까봐 덜컥 겁이 났다. 형 내가 잘못했어. 아까 나쁘게 말해서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내가 잠깐 미쳤었나봐.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뱉으며 눈을 감은 순간 눈물이 떨어졌다. 지훈은 관린이 우는 것을 알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상황이, 이런 감정이 끔찍했다. 울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흔한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는 관린이 저 하나 때문에 무너질 때면 지훈은 제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망가뜨리는 기분이 드는데 이것이 과연 사랑인지도 의심스러웠다. 문밖에서 관린은 계속 용서를 빌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지훈은 관린이 제게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렇게까지 제게 애정을 구걸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해진 우리의 사랑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겨울보다 밤이 짧아져 어느새 미명이었다.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 푸른빛이 감돌았다. 마침내 지훈은 문을 열었다. 관린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내려다보이는 관린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못 견디게 피로하면 눈 주변이 빨갛게 붓는 관린을 알고 있었다. 과제 때문에 이틀 밤을 꼬박 새워놓고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었다. 연락도 없이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지훈을 기다리느라 관린은 그랬을 것이었다. 처참하게 부은 눈으로 울고 있는 관린을 보고 지훈은 표정을 찌푸렸다. 너 때문에, 진짜 미치겠다. 지훈이 희미하게 읊조린 말끝에 관린은 바닥과 벽을 짚어가며 느리게 일어났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지훈을 끌어안았다. 뜯어서 피가 나는 입술이 관린의 어깨에 짓눌렸다. 지훈은 관린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지훈이 아니면 안 되는 관린처럼, 지훈도 관린이 아니면 안됐다. 그래서 끝낼 줄을 몰랐다. 헤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지훈은 두 팔을 위로 들어 관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때였을까. 지훈은 언젠가 관린과 헤어지게 되리란 걸 예감했다.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마침내 헤어지고야 말 것이라고.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굴뚝같아도, 결국에는 네가 없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압도했다. 그래서 진짜로 헤어질 수 없었다. 모든 이유에 따라 붙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관린은 한국에 터를 잡을 생각이었다. 단지 박지훈 때문에. 그렇게 꼬박 삼년을 사귀었다. 지훈은 졸업을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나씩 그만 두었다. 마지막 종강을 마친 뒤, 끝으로 호프집을 관두고는 침대에 달라붙어 내리 잠만 잤다. 그럼 관린은 지훈이 깰까봐 바닥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을 뜨면 지훈이 곁에 누워 자고 있었다. 관린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불을 들어 폭 감싸오면, 지훈이 눈감은 채 관린의 목 밑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멀쩡한 침대를 두고 미적지근한 바닥에서 같이 잠을 잤다. 바야흐로 세 번째 겨울이었다. 그들은 그때가 되어서야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실컷 했다. 이틀에 한 번씩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유명하다는 맛집을 일부러 찾아가서 줄을 서서 밥을 먹고,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놓고 마주 앉아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추운 줄도 모르고 손을 붙잡고 발이 가는대로 길을 걸었다. 뺨이 빨갛게 얼어도 괜찮았다. 좋았다.
크리스마스 날, 지훈이 관린에게 선물한 것은 전기밥솥과 쌀이었다. 이게 뭐야? 관린이 웃으며 묻자, 지훈이 밥솥. 하고 정직한 대답을 했다. 너 밥 좋아하잖아. 즉석밥 좀 그만 먹으라고. 상자에서 나온 반질한 새 밥솥은 조리대 한편에 놓였다. 지훈은 밥 짓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둘은 주방에 나란히 서서 똑같이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지훈은 하나씩 관린에게 설명했다. 첫 번째, 밥그릇으로 쌀을 세 번 퍼 담는다. 두 번째, 쌀을 깨끗이 여러 번 씻는다. 세 번째, 밥물을 적당히 맞춘다. 네 번째, 압력 취사 버튼을 누른다. 간단히 브리핑을 마친 뒤에는 시범을 보였다. 솥에 쌀을 세 번 퍼 담고, 쌀을 깨끗이 씻었다. 지훈은 다시 물을 버리고 정수를 부었다. 그런 뒤에는 손을 담가 물의 정도를 확인했다. 손등 여기까지 오면 돼. 네 손도 넣어봐. 지훈의 등 뒤에 서있던 관린도 밥물에 오른손을 담갔다. 이 정도. 지훈이 짚어주는 손등 지점을 바라봤다. 기억해. 지훈이 관린을 보며 말했다. 관린은 응. 하며 지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을 누른 채 지훈을 뒤에서 끌어안고 왼 손목을 쥐었다. 지훈은 자신의 왼 손목에 감긴 관린의 왼손 약지에서 은색 반지를 봤다. 그걸 본 순간 자신의 약지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졌다. 사랑해. 관린은 지훈의 귓가에 조용히 사랑을 고백했다. 지훈은 서글픈 표정을 지었지만 관린은 보지 못했다. 지훈은 금방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고, 화답하듯 관린에게 키스했다. 그래서 지훈이 얼마나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는지, 관린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
새해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들은 여느 날처럼 같이 저녁상을 차렸다. 전기밥솥으로 관린이 지은 밥이 다소 질게 된 날이었다. 그리고 찌개를 좋아하는 관린을 위해 지훈이 한동안 연습을 거듭한 김치찌개가 처음으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끓여진 날이었다. 같이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같이 차린 식탁에 마주 앉아 관린은 물었다. 기대한 이상적인 대답은 ‘그래’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음에’가 적당했다. 헤어지자, 우리. 지훈은 관린에게 그렇게 대답했다. 너무도 평소 같은 말투였다. 관린은 지훈이 끓인 김치찌개를 한 수저 떠서 밥으로 가져가다 그 말을 들었다. 그것이 헤어짐을 통보하는 말이란 걸, 조금 시간이 뒤에야 깨달았다. 갑자기 왜? 관린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서 물었다. 지훈은 관린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관린은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그런 천진한 표정이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쓰더니 곧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왜라니. 평생 백년해로라도 할 줄 알았어?
지훈은 서울을 떠난다고 했다. 본가가 서울도 아니고, 졸업도 했으니 돌아갈 이유가 충분하다고 했다. 부모님도 거기 계시고, 꼭 서울에서 취업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마주 앉은 관린의 눈을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지훈은 말했다. 너무 지쳤어. 이젠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 관린은 말을 잃은 채 지훈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훈은 젓가락 끝으로 무른 밥알을 살살 긁고만 있었다. 원래 졸업하면 본가로 내려갈 생각이었어. 여긴 너무 시끄럽고 복잡해. 관린은 수저를 내려놓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해? 더 빨리 얘기해줄 수 있었잖아. 내가 계속 한국에 있을 거라고 말했어도, 아무렇지 않았잖아. 어떻게 나한테 이래, 형.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지훈에게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도 이성적이라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이미 결정했어.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관린은 당장이라도 이성을 잃을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그럼 난 이제 어떡해? 관린에 물음에 지훈의 손이 멎었다. 마침내 지훈은 관린을 바라봤다. 관린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얼굴을 하는 건지 싶었다. 어떻게 저리도 딱한 표정을 짓는 건지. 관린을 보는 지훈도 동등하게 괴로웠다. 관린은 다시, 지훈을 설득했다. 그렇다고 헤어질 필요까지 있어? 각자 지내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자. 계속 그래왔잖아. 형 집에 가고 싶으면 가도 돼.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게. 일 년 뒤에 나 졸업하면 다시 만나자. 어? 나도 꼭 서울에 있고 싶은 건 아니니까. 내가 형 있는 데로 가는 방법도 있고…. 지훈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앞에 놓인 관린의 손등을 덮었다. 관린아. 우리 이만하면 됐어. 지훈이 말했다. 관린은 어딘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훈의 말을 듣고 조용히 목을 숙였다. 이만하면 됐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어떻게 그렇게 말해.
헤어지지 않으려 한다면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서울에 남아 관린과 계속 지내는 쪽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럴 기운도, 의지도, 이유도, 사랑도 불충분했다. 서울에서 내 집을 얻고, 사람답게 지내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지 모를 만큼 지훈은 어리지 않았다. 스물여섯의 지훈은 서울이 싫었다. 제 모든 걸 불살랐기 때문인지 한 톨의 동경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날마다 숨 가쁘게 분주해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대도시가 지긋지긋했다. 고모의 집도 관린의 자취방도 지훈에게 집이 되진 못했다. 언젠간 나가야 할 곳. 잠시 머물게 될 임시거처. 그 뿐이었다. 또 지훈에게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아빠 대출 빚과 학자금도 갚아야 했고,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그것들을 ‘잘’ 책임지기 위해서 일부를 포기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건 제게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포기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마지막 종강을 앞둔 어느 날, 지훈은 고모집 작은방에 누워서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자신이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해본 적이 있었다. 일단, 서울. 엔터키를 눌러 줄바꾸기를 하고, 다음 줄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한참 바라보다 느리게 관린을 입력했다. 결국 제게 전부라고 여겼던 것들이 전부 포기될 쪽에 놓였다. 지훈은 여전히 관린을 사랑했지만, 관린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쥔 채 숨죽여 울었다. 관린을 포기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관린을 포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슬펐다. 그것이 지훈을 울게 만들었다.
서랍이 위에서부터 한 칸씩 열렸다가 다시 닫히길 반복했다. 한데 섞인 서랍 속에서 제 것을 구분해 가방에 눌러 담는 지훈을 지켜보다, 관린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형 제발 이러지마. 부탁이야. 제발. 진짜 미칠 것 같아. 관린은 천천히 점멸하듯 몸을 숙였다. 지훈은 티셔츠를 쥔 채 입안에 여린 살을 아프게 물었다. 그리고 다시 티셔츠를 접어 가방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런 뒤에 관린을 바라봤다. 제 발치에 무릎을 꿇고 납작하게 엎드려있는 관린의 마른 등을 본 순간, 지훈은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표정을 구겼다. 지훈이 없는 관린은 다시 떠돌게 될 것이었다. 지훈은 알고 있었다. 지훈이 아니면 관린은 한국에 정착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훈은 관린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바닥을 향해 구부러진 관린을 간신히 일으켜 품에 안았다. 어깨 위로 관린의 무게가 얹혔다. 지훈은 두 팔로 관린을 감싸 안았다. 이젠 정착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관린이 말했다. 백년해로까진 못해도 십년은 거뜬히 머물 수 있을 줄 알았어. 십년동안 형이랑 여기서 나는….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에 관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훈은 표정을 뭉개며 관린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사랑하는 냄새. 내가 아니더라도 너는 정착하게 될 거야. 지훈이 말했다. 관린은 도무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박지훈이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지훈은 오랫동안 관린을 타일렀다. 남들 다하는 연애, 남들 다하는 사랑, 우리라고 대단해지는 건 아니라고. 이건 영화도 소설도 아니라서 길게 잡아끌수록 미련 떠는 것밖엔 안 된다고. 더는 아까운 것들을 서로에게 낭비하지 말자고. 관린은 그때서야 진짜 헤어짐을 직감했다. 더는 지훈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을 느꼈다.
마지막 섹스는 느리고 절박했다. 그리고 필사적이었다. 주고받는 대화도 없었다. 입은 숨을 쉬고, 마지못해 키스를 해야 할 때에만 쓰였다. 눈을 맞추다가 입술을 맞대고 혀를 얽을 뿐이었다. 관린은 입을 맞출 때 말고는 지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 실감도 나질 않았다. 이런 것이 이별의 과정이라니. 우리는 결국 헤어지게 된다니. 관린은 제 밑에서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있는 지훈의 목덜미를 만졌다. 뜨끈한 열감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박지훈이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우리는 시작이 순조로워서 끝이 비극이던가. 생각한 관린은 엄지를 세워 지훈의 동그란 턱 끝을 눌렀다. 헐겁게 다물려있던 입술이 느슨히 벌어지는 모양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검게 그림자 진 입안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처럼 보였다. 지훈은 관린에게 감은 다리를 옥죄었고, 관린은 침대 헤드를 붙잡고 허리를 쳐올렸다. 관린은 몇 번이고 느리게, 또 깊게 지훈에게로 틀어박혔다. 관린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일 때마다 지훈의 벌어진 입술에선 아, 아,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끝까지 박아 넣은 채 움직임을 멈추자, 지훈은 가늘게 몸을 떨며 바닥으로 반쯤 밀려난 이불 끝을 움켜잡았다. 관린은 미간을 좁혔다. 작정했는지 결코 울지 않는 지훈이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상체를 숙여 검은 구멍 같은 입안으로 혀를 쏟았다. 관린은 ‘이대로 박지훈에게 집어삼켜졌으면’ 싶었다. 박지훈 몸 속 어딘가에 기생하여 같은 불행과 고통을 느끼면서, 보잘 것 없는 일생을 살다가 박지훈이 죽음과 동시에 죽고 싶었다. 등으로 뭉툭한 손톱이 박혔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실감나지 않았다. 사정이 가까웠을 때, 지훈은 그제야 문장을 뱉었다. 그냥 안에다 싸. 관린은 지훈의 그 말이 지독하게 미웠다. 평소엔 죽기보다 싫어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제 정말 끝이라는 듯이. 마치 최후의 적선처럼 여겨졌다. 관린은 대항하듯 예고 없이 지훈의 안에 불쑥 사정했다. 지훈은 벌컥 숨을 터트렸다. 싫다는 말 대신 지그시 어깨를 밀어내는 지훈의 팔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단단히 고정했다. 관린은 평소와 다르게 단호했다. 게다가 다소 불친절했다. 그럼에도 지훈은 평소와 다르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감내했다. 별안간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느낌, 배꼽 안팎으로 고이는 느낌에 지훈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관린은 지훈의 허벅지를 바짝 눌렀다. 지훈은 가파르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밑바닥부터 낱낱이 파고드는 까마득한 오르가즘이 못 견디게 끔찍했다. 관린은 제 밑에서 파드득 떨고 있는 지훈을 조심히 끌어안았다. 지훈은 매달리듯 관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관린이 미어지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지훈은 쇄골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고스란히 감각하면서, 아주 더디게 관린의 축축한 뒷목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나직이 말했다. 결국 다 지나가.
본가로 내려가기 하루 전, 지훈은 관린의 집에서 잠을 잤다. 고속터미널까지 교통편이 수월하다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 교통편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둘은 침대 위에 같은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벽을 향한 지훈의 뒤에서 관린이 팔을 내어주고 있었다. 방안은 캄캄했다. 현관에 세워진 캐리어 때문에 가끔씩 센서등이 켜지곤 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훈은 제 가슴팍에 놓인 관린의 손을 붙잡았다. 관린아. 응. 사실은. 응. 나는 처음부터 네가 좋았어. 그랬어? 응. 네가 고사성어 책 빌려가던 날부터. 그래서 학생증에 적힌 네 이름 보자마자 외웠어. 형, 혹시 내가 두 번째로 빌린 책이 뭔지 기억해? 어. 뭐였는데. 첫사랑, 제목이 첫사랑이었어. 관린은 인상을 찌푸리고 지훈의 뒤통수에 코를 박았다. 첫사랑이었구나, 내가 빌린 게…. 까먹고 있었어. 말하며 지훈이 새어나가기라도 할까봐 그를 꽉 끌어안았다. 박지훈. 응. 반지 가져가. 그거라도 가져가. 알겠어. 박지훈. 응. 지훈아. 응. 제발 사랑한다고 말해. 다시 나 보러 온다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말해. 제발…. 관린의 말끝에 센서등이 밝았다가 금방 사그라졌다. 사랑처럼. 남들이 다하는 흔한 사랑처럼. 지훈은 관린의 손을 붙잡고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캐리어를 현관으로 옮기는 소리에 잠에서 깼지만 관린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로 누운 몸을 고정한 채 눈만 떴다가, 조용히 다시 감았다. 캐리어를 옮겨두고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바퀴 끌리는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도어락이 걸리는 소리, 복도를 걸어 나가는 발소리가 차례대로 들렸다. 관린은 다시 눈을 떴다. 천천히 침대를 내려가서 집안을 둘러보는데 모든 게 그대로였다. 벌벌 경련하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전부 제자리에 있는데 박지훈만 없었다. 얼굴로 손을 가져가다, 손등에 그려진 선을 보고 웃음이 났다. 그가 말한 적당한 밥물의 정도가 검은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눈물이 쏟아지면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고통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주저앉았다. 속에서 용솟음치는 깊은 울음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런 사랑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이별이 있나 싶었다. 남들 다한다는 그 흔한 것이 제게만 별난 것인지, 모두에게 하나같이 별난 것인지. 다들 그렇게 유별난 사랑을 하고, 이렇게 유별난 이별을 겪는 것인지. 결국 결합에 실패한 은하도 이러한 고통을 겪는지. 관린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박지훈이 필요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관린은 졸업까지 아직 일 년이 남아있었다. 봄은 다시 돌아왔고, 학기가 시작되었다. 봄이 무르익어 가는데도 관린은 왼손에 끼인 반지를 제 몸처럼 여겼다. 그것이 유일한 연결고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봄이 무르익어 가는데, 도무지 잊힐 줄을 몰랐다. 관린은 여전히 바닥에서 잠을 잤고, 잠결에 옆을 만졌다. 또 새벽에 이유 없이 켜지는 센서등 불빛에 잠에서 깨곤 했다. 조용히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는 관린을 보며, 진짜 귀신같네. 웃는 나긋한 목소리가 눈과 귀에 선했다. 나 예쁘다고 사장님이 치킨 튀겨주셨는데. 안 잘 거면 일어나, 같이 먹자. 아직 따뜻해.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화장실로 들어가는 지훈을 바라보다, 진짜가 아니란 걸 금방 깨닫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장이 모조리 뒤틀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죽었으면 싶었다. 관린은 홀로 그런 시간 속을 살았다. 혼자 잠을 자고, 혼자 밥을 먹었다. 손등에 그려진 펜 자국은 지워졌지만 관린이 여전히 그 흔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밥물의 정도를 알맞게 맞출 수 있게 됐다. 맑은 밥물에 손을 담그고 있다가 우는 일이 많았다. 이 정도. 기억해. 손등을 짚어주던 지훈이 생각나서. 그리움으로 밥물에 눈물을 떨어뜨리고, 그것으로 고두밥을 지어 먹었다.
관린은 지훈에게 세 번의 전화를 걸었다. 세 번 다 연결이 되진 않았다. 첫 번째 전화는 지훈이 떠난 지 한 달째가 되던 날이었다. 개강을 하고, 처음 도서관에 갔던 날이었다. 교양으로 듣게 된 동양 철학 강의에서 필요한 책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관린은 그날 두 권의 책을 대출했다. 한 권은 강의에 필요한 < 손자병법 >이었고, 다른 한 권은 < 영어속담과 함께 읽는 고사성어 >였다. 데스크에 책을 놓고 관린은 기억 속의 지훈을 바라봤다. 내민 책과 학생증을 받아 바코드를 찍으면서 아무런 내색 없이 제 이름을 외우던 지훈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지훈에게서 무심한 물음이 건네졌다. 읽긴 읽어요? 관린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다, 지훈에게 대답했다. 이제 읽으려구요. 읽어보려구요. 그러자 데스크 너머의 처음 보는 근로 장학생이 네? 하는 소리를 냈다. 관린은 대출한 책들과 학생증을 챙겨서 조용히 도서관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 고사성어 책을 읽었다. 낙화유수落花流水, 연모지정戀慕之情. 꽃은 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기를 바라고, 물은 꽃을 싣고 흐르기를 바란다. 가만히 있어도 물은 흐르고 꽃잎은 떨어지는데, 연모하는 그대의 생각 도무지 잊히질 않네. 그러한 심경으로 관린은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닿질 않았다.
이별을 혹처럼 달고 살았다. 하루하루 기쁘게 사랑을 깨우쳤듯, 하루하루 괴롭게 이별의 찌꺼기를 게웠다. 그렇게 서서히 무디어 질 따름이었다. 두 번째 전화는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북상한 장마전선으로 전국에 폭우가 내리던 때였다. 전화를 받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삐― 소리를 듣고, 관린은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형. 한마디를 뱉자마자 눈시울이 따가웠다. 관린은 눈가를 세게 한 번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형. 나야. 관린이. 서울은 비가 많이 오는데, 거긴 어때? 뉴스에서 형 사는 데가 서울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하던데. 어떤지 모르겠네. 잘 지내지? 박지훈 원하던 대로 편안하고 조용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여긴 아직도 그대로야. 매일 시끄럽고 복잡해. 서울이 그렇지.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 형이 사준 밥솥으로 밥도 완전 잘 해먹고 있어. 이젠 밥물도 그럭저럭 잘 맞춰. 저번 주에 갑자기 밥솥 꼭지가 빠진 것 말고는 별 일 없어. 그거 때문에 고객센터에 전화도 했거든. 근데 다시 돌려서 끼우면 된다고 하더라고…. 진짜 바보 같지. 나 원래 좀 바보 같잖아. 등신 같고. 관린은 잠깐 씩 웃었다가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형, 나 졸업하면 돌아가려고. 어디로 돌아갈지는 아직 못 정했는데, 대만 아니면 미국이겠지. 나도 집에 돌아가서 좀 쉬게. 서울이 좀 지겨워졌거든. 돌아가면 한국에는 다신 안 올 생각이야. 정말 늙어서 죽을 때까지 절대 얼씬도 안 해. 분명 좋은 기억이 더 많은데, 아픈 기억이 날 너무 아프게 해서. 그래서 못 올 것 같아. 형 말대로 이건 영화도 소설도 아닌데, 왜 나만 이렇게, 구질구질한 건지 모르겠어. 왜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나를, 울게 만드는지 모르겠어. 내가 형을 너무 사랑했나봐. 그래서 아직도 이런가봐. 형. 나는 아마도, 두 번 다시 누굴 그렇게 사랑하진 못 할 것 같아. 이젠 그렇게 사랑할 자신이 없어. 누굴 만나도 박지훈만큼 사랑할 수는 없어. 나는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게. 그리고 우리 다음 생에도 만나자고 했던 말 취소할게. 다음 생에는 우리 절대로 만나지 말자. 이번 생에 만났으니까 됐어. 한 번 지겹게 사랑해봤으면 됐어. 그래, 우리 이만하면 됐지…. 두 번은 못할 짓이야. 건강하게 잘 지내. 나도 그럴게. …녹음되었습니다. 메시지 전송은 1번, 녹음 내용 확인은 2번, 다시 녹음하시려면 0번……. 전송되었습니다.
세 번째 전화는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술에 취해 전화를 걸었는데 결번이었다. 다음날 관린은 눈을 뜨자마자 통화기록을 확인하고 번호를 삭제했다.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빼낸 것도 그때였다. 반지를 쥐고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욕실로 들어가서 변기에 떨어뜨렸다. 레버를 누르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눈 깜짝할 새에 반지를 삼켰다.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지훈과의 삼년이, 그리고 사랑이 한순간 물살에 휩쓸려 저 너머로 사라졌다. 관린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그때서야 벽에 붙어있는 지훈의 칫솔걸이를 떼었다. 핸드폰 앨범에 남아있는 지훈의 흔적들도 모조리 지웠다. 둘이 찍은 사진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지훈이 찍힌, 그리고 그가 찍은 사진과 영상들을 한꺼번에 선택해서 미련 없이 휴지통 버튼을 눌렀다. 한참 핸드폰을 붙들고 사진첩에서 박지훈만 깨끗하게 도려내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앨범의 반 이상이 삭제된 항목으로 이동되었다. 관린은 그것들을 그대로 영구 삭제시켰다. 우리를 위한 선택이 곧 나를 위한 선택이라고 믿었듯, 이제 나를 위한 선택이 곧 우리를 위한 선택임을 믿기로 했다.
하루는 지훈이 떠나던 날의 꿈을 꿨다. 꿈에서의 모든 게 그날과 같았다. 관린은 그날처럼 침대에 누워, 지훈이 캐리어를 현관으로 옮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모로 누운 몸을 고정한 채 눈만 깜빡였다. 캐리어를 옮겨두고 잠시 동안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현관문이 열렸을 때, 관린은 몸을 일으켰다. 현관을 나서는 지훈을 붙잡았다. 돌려세운 지훈은 울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울고 있을 줄 알았어. 관린은 울고 있는 지훈을 품에 안았다. 형, 그동안 수고 많았어. 이젠 집에 가서 좀 쉬어. 거기서는 잠 못 자서 절절매지도 말고, 과분한 책임감 때문에 강한 척만 할 필요도 없어. 거기선 박지훈 너부터 생각하면서 살아. 여기서 시끄럽고 복잡했던 건 다 잊어버려. 그리고 행복했던 기억만 가져가. 남은 건 내가 다 가져갈게. 내가 기억할게. 나는 평생 등신 같이, 네가 있는 기억 속에서 네가 준 사랑으로 밥을 지어먹고 살 테니까. 그렇게 등신 같이 사랑을 무릅쓰고 살아갈 거니까. 뒤돌아보지 말고 가. 박지훈, 잘 가. 잘 가서, 잘 살아. 덕분에 나는 행복했어. 정말 많이 행복했어. 고마워. 평생 잊지 않을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뒤에도 기억할게. 사랑했고, 사랑해. 이것만 알아줘. 사랑해. 여전히 많이. 관린은 천천히 지훈을 놓아주었다. 마주본 지훈의 눈에서 눈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봤다. 지훈은 아무 말 없이 포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서 관린도 웃었다. 관린이 웃는 걸 보고나서야 지훈은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현관 센서등이 깜빡였다. 꿈을 꾸는 관린의 눈꼬리에서 무거운 눈물이 모로 미끄러졌다. 잘 가, 지훈아. 입술을 작게 뻐끔거리면서.
박지훈 없이 일 년이 지났다. 어떻게 일 년이 지나갔는지, 관린은 문득 지난 시간이 새삼스러웠다. 손에 쥔 모래처럼 흘러간 일 년이 무색하게 액정 속 지훈의 모습이 너무도 여전해서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지훈을 온전히 사랑하던 그때, 관린은 자신이 어떤 기분, 어떤 표정으로 지훈의 사진을 찍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걷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박지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가늠하여 표현해보는 건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건 관린과 지훈만 아는 일이었다. 당사자만 반추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이별을 모르고 사랑했던 그때, 행복해서 웃었던 기억 때문에 관린은 지금 얼굴을 찌푸린다. 은하의 충돌은 인간의 사랑을 닮았대. 지훈의 음성이 선명하게 뇌리에 번진다. 관린은 금이 가고 낡은 핸드폰에 이마를 대었다. 그리고 괴롭게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흠집 나지 않았던, 흠집이 있었어도 눈에 띄지 않아서, 모든 게 괜찮았던 그때 때문에. 기나긴 유학생활이 끝난 뒤였고, 지난 결정도 지난 사랑도 번복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현재의 관린을 그토록 울게 만들었다.
외로움이 만연한 도시에 진부하고 흔해빠진 결말의 사랑 이야기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