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kira_oinmg)
박지훈, 복학생, 연극학과 3학년.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누군지 모를 것 같다. 고로, 다시 소개해 보자.
이름 모름, 지옥에서 온 복학생, 아마도 연극학과 선배……?
됐다. 이게 바로 박지훈이다. 지옥에서 온 복학생이자 어디 과인지도 모를 자발적 아싸 선배. 뭐 더 덧붙여주고 싶어도 인적사항이 없다. 저 허접한 한 줄만 덜렁, 끝. 존재감이 없어서 그런가?
박지훈이 원래 이렇게 후지게 살지는 않았다. 그래 봬도 고등학교 땐 간지 나는 대학의 간지 나는 연영과가 목표였더랬다. 그땐 인싸였냐고? 아싸였다. 대신 멋진 아싸였다. 도대체 멋진 아싸는 어떤 아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 간지 작살 연영과를 바라보고 달려온 지금 지훈은 고향에서 이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타지의 연극학과에 와 있다. 목표는 이뤘다만 간지 작살이 아닌 이유는, 고향이 서울이다.
그러니까 박지훈이 후져진 건 삼수+미래 없음+원체가 노잼에 군대 전역과 복학까지 더해져서라는 소리였다. 존나 완벽하다. 젊은이를 위한 종합 선물세트 같고. 이제 휴학만 나오면 완벽하네. 몇 없는 '친구'와 술만 마셨다 하면 꼭 저 똑같은 레퍼토리로 곡소리가 나왔다. 흉측한 가짜 울음이 이어지면 맛이 갔다는 신호고, 그럼 우진이나 진영이 우거지상을 하고 흐느적거리는 몸뚱이를 들어 날라야 했다. 생각할 때 한 번쯤은 길바닥에 버리고 간 적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지훈은 웬일로 아주 멀쩡하게 자취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니, 멀쩡하긴. 머리가 존나 깨질 것 같다. 서랍에다 팔을 휘적여 타이레놀을 찾으며, 박우진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참 헤집어도 약봉지 느낌이 없길래 기어이 안경을 꿰차고 들여다보았다. 있긴 있는데, 낱개로 뜯어진 우먼스 타이레놀이다. 저게 몇 년 된 거지. 마지막으로 여자랑 만났을 때가 스무 살 때였다. 재수생이 뭣도 모르고 하하 호호 하다가 실기를 거하게 말아먹고 나서야 헤어졌었던 거 같다. 좆이 안 섰다는 건 그다음에 안 거였다. 시발…엄마 보고 싶다. 해장은 우리 엄마 김치찌개가 짱인데.
"어 야. 우리 어제 집 몇 시에 들어갔냐?"
포트에 물이 끓는 동안 박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유는 딱히 없다. 가끔씩 술 마시다 필름 끊긴 날은 내 몇 시간의 공백기를 알아내야 하니까. 이쯤이면 부재중으로 넘어갈 거 같은데, 싶을 때 전화를 받은 박우진 목소리가 가관이다.
"모올라 시발… 한 열 한시?"
"지랄하네. 오다리 씹을 때 열한시였어."
그렇게 잘 알면 왜 물어봐…병신아. 기포를 내보내며 요란한 소리 때문에 푸념하는 목소리가 자꾸 끊겨 그냥 포기했다. 어차피 전부 다 지훈의 쓰레기 같은 주량과 있는 대로 퍼마신 자기 근자감에 대한 의미 없는 욕이다.
"아. …한 시였겠다."
"왜 갑자기."
"한 시에. 한시 반인가?… 어, 시발."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게 한 세월이다. 뭐 왜. 너 오밤중에 이중약속 잡았었냐? 되물은 말에 화면 너머에서 끅끅대는 웃음소리가 들리기에 그 말이 그렇게 웃겼나 생각했는데.
"야… 미친. 존나 미안. 나 그때 라이관린 불렀다."
그러고도 한참을 숨넘어가게 처웃는다. 지훈은 어이가 털려 따라 쪼개줬다. 우리 우진이가 아침에 일어나면 꼭 유머 감각이 좆 같아진다니까.
"존나 미안하다 시발. 나도 개 꼴았잖아. 너 끌고 집 가기 싫다고 관린이 불렀어……"
시발. 물이 끓은 포트가 잠잠해졌다. 타이밍 좋게 전화가 뚝 끊겼다. 좆됐다.
라이관린을 처음 본 건 개강날이었다. 다 똑같이 생긴 대가리들 사이에 우뚝 솟은 반듯한 놈을 보고선 여자애들이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럴 만도 했는데, 라이관린은 농담 반으로 지훈이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겼다. 그러길래 본인도 난리를 쳤냐면 그건 아니다. 잘생겼지만 식성은 아니었다. 그래서 관심이 없었다. 없었는데, 애새끼 하는 짓을 보면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시작은 개강하고 이주일이 지나 이름을 주워들었을 때였다. 라이관린 네 글자가 누가 봐도 한국 사람 이름은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떠오른 생각, 쟤는 외국인이 한국 지잡대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다음부터는 쭉 성깔 때문이었다. 내 아들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 학교 대숲의 절반은 라이관린 얘기일 거다. 물론 연극학과에 잘생기신 분 누군가요라는 글도 올라오긴 했다. 2할 정도. 나머지 8할은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혹시 신입생 중에 구준표가 있는 건가요 아니면 연극학과 외국 애 컨셉충인가요 원래 저러나요. 어. 지훈도 궁금했다. 그래도 세상에 자기 말고 딴 사람도 존재한다는 건 아는 모양인데. 분명히 공익일 19학번 과대의 군대 놀이에 맞춰주긴 했었다. 지금까지도 걔가 동기들하고 세 마디 이상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혹시 얘도 자발적 아싸를 추구했던 건가?
이번엔 자신 있게 박우진의 아들을 건다. 그때 술 마시고 곧 죽어도 엠티를 가야겠다던 박우진을 따라간 건 절대로 지훈의 의사가 아니었다–솔직히 말하면 맞았다. 그러니까 박우진 걸 걸었지–. 근데 어쩔 수가 없었다. 라이관린님이 엠티를 오신다는데 또 연극학과 공식 게이 박지훈이(이건 개소리다. 엄마네 집 맥스한테도 커밍아웃 못했다) 가 줘야지 어쩌겠는가. 굉장히 이상하고 존나 시크한 애새끼 분이 어쩐 일로 엠티에 행차하셨다는데–정신 나간 19학번 과대가 협박했을 거 같다– 어떻게 안 가보냐고.
그리고 가서 뭘 했냐고? 몇 잔 하지도 않았는데 존나 꼴아선 애들 술 게임하는데 찌그러져 있다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곤란해하지도 않은 라이관린의 흑기사를 자처했다. 그것도 걔 걸릴 때마다. 시발. 라이관린(과 애들)이 얼마나 놀랍고 불편하고 웃겼을까 생각도 하기 싫다. 도대체 나 얼빠 게이요 소문내는 것도 아니고 술버릇이라고 커버칠 수도 없고. 그딴 술버릇이 있었는지 솔직히 그게 술버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 박우진은 끼기 전에 마시고 낀 다음엔 안주나 쪽쪽 빨아댄 탓에 지훈이 완전 꼴았을 때 좀 깼고, 그 덕분에 지훈을 끌고 얘들아 미안, 하하, 하며 나와줄 수 있었다. 그 다음날 지훈은 에타에 들어가지 않았고, 다음의 다음날부터는 평소보다 약간 더 짜져 살았다. 약 일주일 동안. 물론 라이관린은 절대 안 마주쳤다. 백 퍼센트 지훈의 의지였다. 이번 학기만 끝나면 휴학하고 말겠다는 결심에서 나온 임시방편이었다. 사 주를 얼마나 개 찐따같이 살았는데 박우진이 한 방에 그 노력을 날려버렸다. 지훈은 오늘만 두 번째로 박우진을 죽이고 싶어졌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김치찌개를 못 먹겠으면 김치 라면이라도 먹어야지 해서 꺼낸 것이 오뚜기였다. 유통기한이 삼 일 남은. 컵라면 뚜껑을 따고 조용해진 물을 따르면서, 지훈은 정말로 울고 싶었다. 어제 기억이 5분만이라도 돌아오면 지금보단 존나 나을 텐데. 고개를 숙이자마자 코끝에 매달린 안경으로 훅 김이 올라왔다. 짜증이 몰아쳐 되는 대로 면발을 입에 처넣는데 띵,
– 아 맞다 야
– 관린이가 너 데리고 가준 거다. 난 걔가 ㄹㅇ온거 보고 개놀랏음.
– 걔는 대체 뭐하는 새끼냐
아. 오늘이 여기서 더 끔찍해질 수가 있었다. 벌떡 일어나자 그릇에 꽂힌 젓가락 두 개가 요란하고 처량하게 바닥을 구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