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rum2033)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면 이게 사랑이 아니길 바라던 때도 있었다.
지훈은 오랜만에 학교에 들렀다. 죽을 만큼 뜨고 싶었던 곳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곳곳에 남은 그리움이 많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드는 기분인 것 같기도 했다. 언덕을 한참 걸어 내려갔다. 교수와의 면담은 영양가가 없었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학교가 돌아오라던. 마음먹고 서류까지 제출한 마당에 그럴 일은 없었다.
지훈은 아직도 글을 쓸 때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어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우울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던 지훈은 더는 우울해질 수 없었다. 자신을 혹사시키며 집중하려는 방식도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불을 꺼놓고 빈 화면을 보고 있자면 자꾸만 잡념이 들어앉았다.
그 모든 잡념 속엔, 관린이 있었다.
지금 관린을 만나면 마음이 흔들릴 것을 알면서도, 지훈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얼굴을 보고 싶었다. 번호는 지운 지 오래였다. 기억력이 나빠서 다행이었다. 생각해보면 번호 하나 못 외운 게 미안하기도 했다. 일부러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캠퍼스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다는 핑계를 스스로 대기도 했다. 걸음은 자꾸 인문대 앞을 맴돌았다.
지훈은 인문대 건물 뒤의 흡연구역에서 잠시 담배 한 대만 피우기로 했다. 인문대를 지나가던 관린과 처음 마주친 곳이기도 했다. 그 후로 관린은 틈만 나면 그곳을 서성거렸다. 담배도 피울 줄 모르면서. 라이터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지훈은 어이없게도 웃음이 났다. 그때도 이런 상황이었다. 지훈은 주머니에 라이터가 없었고, 마침 관린이 인문대를 지나갔다.
―관린. 라이터 있어?
―엇, 아뇨.
지훈은 그때 관린의 간절한 얼굴이 생생하게도 떠올랐다. 재미없는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허공을 보면서 웃기도 했다. 그 다음 관린의 질문이 웃겼다.
―제가 가서 사올까요?
―넌 근데 담배도 안 피우면서 왜 여길 이렇게 맨날 와? 나 보려고?
관린은 그때 당돌하게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훈도 사실은 다 알고도 한 질문이었다.
―자꾸 그러면 나 좋아한다고 오해한다.
―그냥 오해해주시면 안 돼요?
지훈은 피울 수 없게 된 담배를 그대로 땅에 버렸다. 그때 선을 그어둘걸 그랬다. 관린이 어느 정도의 진심을 품고 있었는지 알았더라면 분명히 그랬을 거라고 변명했다. 지훈은 예나 지금이나 진지해지는 연애는 싫었다. 관린에게 느낀 흥미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 관계에서 재미를 추구하려는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만은 알았다.
지훈은 담배를 갑째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기분이었다. 관린은 지훈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다. 지훈은 남으로 인해 자신을 바꾸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관린을 남이라고 생각했다. 관린은 자신이 지훈과 닮을 수 없는 부분을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었다. 지훈은 이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관린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담배를 끊는 것 따위로 관린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오랜만에 학교에 들른다고 말하니 친했던 동기들로부터 잠깐이라도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점심시간이 다 지나갔을 즈음이었다. 지훈은 시간이 꽤 남아 도서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도서관에 있는 시간을 좋아하긴 했었다. 도서관 건물엔 교내 문학상 시상식을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지훈이 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도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지훈은 새삼 그 이후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고 느꼈다. 지훈은 한참을 현수막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을 글을 쓰기 힘들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시가 가까워지니 동기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찍 끝났으니 바로 학식이나 먹으러 가자는. 약속까지 잡아놓고는 무슨 학식이냐 투덜거릴 마음으로 지훈은 걸음을 재촉했다. 학생식당은 제대로 된 선택지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선의 선택지라고는 라볶이 정도였다. 점심시간이 지나 텅 비어있던 학생 식당도 사람 넷이 모이니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먹는 밥이 라볶이일 줄은 몰랐네.”
“너 어차피 내일부터 외부인이어서 학식 먹지도 못하잖아. 닥치고 먹기나 해.”
“야 그래도 마지막인데 학식이 뭐냐?”
“박지훈 이 새끼가 저녁은 죽어도 바쁘다잖아. 빨리 처먹어 나 30분 뒤에 시학개론 수업 있음.”
지훈은 그 말에 조금 양심이 찔렸다. 사실 저녁은 바쁜 게 아니라 그냥 비워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이라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모르는 새 꽤 변한 것 같기도 했다.
“너 근데 어떻게 자퇴를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하냐?”
“그럼 자퇴를 온 동네방네 자랑하냐?”
“걔는 안 만나고 가냐? 너 엄청 좋아하던 애 있잖아. 라이관린.”
“……뭘 만나.”
관린과의 사이를 알고 있을 리 없었던 동기들이었다. 지훈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관린과 헤어지면서 크게 상처가 남은 쪽은 제 쪽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마음은 숙연해졌다.
“나 걔랑 안 본 지 좀 됐어.”
“오랜만에 생각난다. 걔한테 좀 잘해주지 그랬냐. 걔가 너한테 되게 잘했던 거 같은데.”
“무슨 소리야. 내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줬……”
지훈은 반박하려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마지막 관린의 그 지친 표정이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그렇게 잘해준 적도 없었다. 생각은 자꾸만 거슬러 올라갔다. 지훈은 지금도 관린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게, 걔 안 본지도 진짜 오래됐네.”
“박지훈. 근데 요즘 몸은 괜찮냐?”
“뭘?”
“너 틈만 나면 기절하려고 한 거 기억 안 나? 넌 진짜 글만 쓰면 식음 전폐하던 습관 고쳐야 돼. 잠도 안 자고.”
“맞다. 그때도 그래서 관린이가 얘 엄청 챙기지 않았냐. 넌 진짜 두고두고 걔한테 잘해야 돼. 그때 걔 아니었으면 너 응급실 열 번은 더 갔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지훈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지훈도 모두 기억나는 일이었다. 지독한 습관이었다. 지훈은 집중이 깨진다는 이유로 글을 쓸 때는 밥도 먹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고 버텼다. 몸을 혹사시키는 건 물론이고 신경은 예민해졌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그러면 꼭 우울한 글이 잘 써졌다. 그때 관린은 지훈을 꼭 꺼내주려 했다. 그게 한참이 지나고야 그리웠다. 자신이 여러모로 관린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것을 이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동기들은 아쉬움 없이 지훈을 보내주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굴었다. 후련한 작별이었다. 자주 만나게 될 인연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훈 역시 그다지 아쉽진 않았다. 지훈은 사람 사이 관계에 미련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흘러가는 상황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쿨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아, 일이 있어서 못 온다네. 관린이.”
“그새 연락했어?”
“엉. 박지훈 학교에 있다고 하면 올 것 같았는데.”
“얜 너한테 미련 없나보다, 야.”
때로는 쿨하지 못한 경우도 필요했다. 지훈은 이제야 그걸 알았다. 동기들이 농담으로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말이 아프게 꽂혔다. 지훈은 관린이 바빠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지훈은 아팠다. 생각해보니 지금껏 아파할 겨를을 스스로에게 준 적이 없었다. 처음엔 관린이 지훈을 아프게 할 정도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그 다음엔 상처를 준 쪽은 아파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에게 문자를 보냈다던 동기는 무엇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양, 지훈에게 한 가지를 더 귀띔해주었다. 이번 문학상은 라이관린이 탔다고. 과방에 가면 그 글이 실린 문집이 있을 거라는 말은 정말 과잉 친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훈은 과방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훈을 본 후배들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과방의 책장에서 올해의 문집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관린은 지훈이 글을 쓰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래서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지훈은 돌이켜보면 관린에게 모질게 굴었던 기억밖에 없었다. 글을 쓰는 건 계속해서 자신과 관린을 상처 입히는 짓처럼 여겨졌다. 헤어지고도 한 동안 몸을 혹사시키며 관린이 와줄까 기대도 했었다. 끝내, 마지막으로 이별을 말했던 것은 관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한때 그것이 사랑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것이 관린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생각했다. 관린의 글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훈은 더 이상 관린을 만날 수 없을 것임을 알았고, 어리석게도 관린을 만날 수 없게 돼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여전히 관린을 사랑했다.
안녕의 방식
Ways to Say Goodbye
그가 나에게 정착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견딜 수 없이 슬펐다. 이제는 다만 그가 더 이상 표류하지 않기를 바란다.
관린은 오랜만에 지훈의 이름을 듣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우습게도 여전히 지훈은 그런 존재였다. 관린은 이제 자신이 꽤나 지훈이 닮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관린은 깊은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 귀찮아졌다.
그것이 다 지훈을 잊지 못해서 그런 것임을 알면서도, 관린은 부정했다. 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관린도 지훈이 그렇게 큰 존재가 아니었다고 믿고 싶었다. 계속 떠오르는 지훈의 생일, 핸드폰 번호, 자취방의 비밀번호가 그 믿음을 무너뜨렸지만. 그저 헤어진 애인을 기억하는 흔한 방법일 뿐이라고 관린은 생각했다.
관린은 많은 사람을 만났고, 동시에 여러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지훈이 그랬던 것처럼. 지훈과 비슷한 사람이 되고 나니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지훈이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지훈은 늘 관린의 감정을 두려워했다. 그 감정이 벅차다고 했다. 관린이 무겁게 만드는 공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관린도 이제는 그랬다. 누군가의 진심이 무겁다는 게 이런 거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전부가 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기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리고 지훈이.
관린은 여전히 지훈이 미웠다. 마지막까지도 지훈은 잔인한 사람이었다. 지훈이 마지막으로 응급실에 갔던 날이었다. 관린은 그럴 거면 지훈이 차라리 글을 쓰지 않기를 바랐다. 이젠 글이 아니어도 지훈을 사랑했다. 관린은 솔직히 지쳤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이야말로 관린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날 지훈을 집까지 바래다 준 관린이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럴 거면 우리 그냥 헤어지자.
지훈은 무표정하게 관린을 한참 쳐다볼 뿐, 대꾸도 하지 않았었다. 지훈은 습관처럼 그 말을 하곤 했었다. 자신은 끝까지 관린이 바라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 거라 단정하며, 그러느니 그냥 헤어지자던. 관린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지훈이 한 번쯤은 잡아줄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헤어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괜한 오기가 들었다.
―한 순간이라도, 나를 사랑하긴 했어?
지훈이 끝까지 그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한 말이었다. 오롯이 자신을 위한 말이었다. 지훈의 침묵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것이라고, 관린은 변명을 했다. 그때 지훈이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그랬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관린은 여전히 지훈의 마음이 궁금했다. 자신이 더 이상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없는 것은 그때 지훈의 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관린은 지훈을 만나고 싶었고, 만나고 싶지 않았다. 지훈이 이제는 아주 괜찮아졌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분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훈은 진작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까. 관린은 지훈이 표류하지 않기를 바랐고, 여전히 표류한다면 한번쯤은 자신을 더 스치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관린은 아주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일부러 계속 일을 만들었다. 기한이 한참 남은 과제들도 해치워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래야만 지훈을 만나러 달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아서 사실은 그저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 수준에 불과하긴 했다. 지훈이 언제까지 학교에 머무를지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은 해가 다 지난 시간이 돼서야 할 일을 접고 나섰다. 인문대 지하에 있는 사물함으로 향한 관린은 자물쇠가 풀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훈의 흔적이었다. 그 문을 열어보는 것이 두려웠다. 여전히 지훈이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자신이 혹시나 희망을 가지게 될까봐.
사물함에는 이번 문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관린의 글이 끝나는 페이지기가 접힌 채로. 그 마지막 문장 뒤로 지훈의 글씨가 있었다. 관린은 여전히 지훈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훈이 미치게 보고 싶었다.
너는 마지막까지 날 보고 싶지 않겠지만.
나는 가끔 네가 생각날 것 같아.
미안했어.
― 언젠가 우리가 같은 바다에서 만나기를, 지훈.